사과의 정치, 정치인의 사과[여의도 백드롭]
by이성기 기자
2022.02.05 08:00:00
잘 하면 약(藥), 잘못하면 독(毒)이 되는 사과
`황제 의전` 논란 거듭된 사과에 野 "유체 이탈" 비판
민심, 사안 자체 보다 태도에 더 민감할 수도
[이데일리 이성기 기자]
|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의 배우자 김혜경 씨가 지난달 20일 충북 청주시 청원구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에서 지역 문화계 인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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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론 라자르는 책에서 “사람들은 사과를 나약함의 상징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사과의 행위는 위대한 힘을 필요로 한다” 고 강조했다.
리더의 핵심적 요건 중 하나인 사과는 `3R`을 전제로 해야 한다고 한다. 유감(Regret)과 책임(Responsibility), 치유 또는 보상(Remedt)이 그것이다. 상대에게 불편을 끼쳐서 미안하다는 `유감`을 표시하고, 그 이유에 대해 진상을 규명하고 법적·윤리적 제반 `책임`을 다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 아울러 이미 발생한 잘못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철저한 대응과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 수립과 추진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이런 요건을 갖추었을 때 사과는 비로소 진정성의 힘을 얻게 된다는 설명이다.
지난달 28일 SBS의 첫 보도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의 배우자 김혜경씨의 `황제 의전` 논란이 불거진 직후, 민주당 선대위 측은 “허위 사실 유포로 선거에 개입하려는 의도가 다분해 좌시하지 않겠다”라는 수행비서 배모씨의 입장을 전했다.
하지만 보도 전후로 배씨가 해당 의혹을 폭로한 A씨에게 문자·전화 연락을 취한 사실이 드러난 데 이어, 의약품 대리 처방·공금 유용 의혹까지 추가로 제기됐다.
그러자 배씨는 지난 2일 오후 실명의 입장문을 내고 “어느 누구도 시키지 않은 일을, 이 후보 부부에게 잘 보이고 싶어 상식적인 선을 넘는 요구를 했다.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면서 “진행되는 수사에 성실하게 임하고 선거운동과 관련된 자원봉사 활동도 일절하지 않으며 반성하는 마음으로 살겠다”고 고개를 숙였다. 40분 뒤에는 김씨 역시 입장문에서 “모든 것이 저의 불찰”이라면서 “공과 사를 명료하게 가려야 했는데 배씨와 친분이 있어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상시 조력을 받은 것은 아니다”고 설명했다.
파문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국민의힘 측에선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다”는 비판이 터져나왔다.
최지현 국민의힘 선대본부 수석부대변인은 구두 논평에서 “나흘 간의 침묵을 거쳐 내놓은 입장이 겨우 국민을 기만하는 것이라니 매우 실망스럽다”며 “수많은 증거 앞에 이런 거짓말을 늘어놓다니 국민이 두렵지 않은 모양”이라고 꼬집었다.
급기야 이튿날인 지난 3일 이 후보가 “경기도 재직 당시 근무하던 직원의 일로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하다”고 직접 고개를 숙였다.
이 후보는 “저의 배우자도 문제가 될 수 있는 일들을 미리 감지하고 사전에 차단하지 못했다”면서 “더 엄격한 잣대로 스스로와 주변을 돌아보려 노력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모자랐다”고 말했다. 이어 “도지사 재임 시절 부적절한 법인카드 사용이 있었는지를 감사기관에서 철저히 감사해 진상을 밝혀주기 바란다. 문제가 드러날 경우 규정에 따라 책임지겠다”고 강조했다. 4일에도 “공관 관리 업무를 했던 공무원 중 피해를 당한 사례가 있다는 점, 논란이 되고 있는 점, 물의 일으킨 점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국민께 사과드린다”고 허리를 숙였다. 또 “관련 기관의 감사·수사가 이미 개시됐기 때문에 그 결과에 따라서 상응한 책임을 충분히 지겠다”면서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필요한 조치는 물론이고 엄정하게 관리해 나가겠다”고 덧붙였다.
|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4일 오후 서울 여의도 중앙당사에서 기초지자체 공약을 소개하는 ‘우리동네공약’ 언박싱 데이 종료 후 부인 김혜경 씨의 `과잉 의전` 논란과 관련해 “국민들께 다시 한번 사과드린다”며 고개를 숙이고 있다. (사진=국회사진기자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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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는 잘 하면 약이 되지만, 잘못하면 독이 돼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다. 이번 논란의 과정을 되짚어보면, 우선 사실 관계 파악 노력부터 게을리했다. 후보 배우자와 관련된 사안의 성격이나 이 후보의 경기지사 재임 시절 벌어졌던 일이었던 점을 감안하더라도, `허위 사실 실 유포`운운하며 `선거에 개입하려는 의도`로 섣불리 단정해선 안 될 일이었다.
40분 간격으로 잇달아 낸 입장문 역시 선후가 뒤바뀐 모양새다. `누구도 시키지 않은 일`을 독자적으로 상식을 넘어선 요구를 했다는 배씨의 주장을 진실이라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국민이 과연 얼마나 될까. 후속 보도로 밝혀진 내용 등에 비춰봐도, 배씨의 해명에는 앞뒤가 맞지 않거나 상식에서 벗어나 보이는 측면이 수두룩하다.
“친분이 있어 도움을 받았다”거나 “`직원의 일`로 심려를 끼쳤다”는 이 후보 부부의 해명 역시 진심어린 사과라기 보다는 눈 앞에 닥친 위기를 모면하려는 변명에 가까운 인상이 짙다.
이런 까닭에 `유체 이탈 대국민 농락 사과`라는 비판을 들어도 할 말이 없게 됐다.
원일희 국민의힘 선대본부 대변인은 논평에서 “이 후보와 김씨의 행태는 행정안전부가 명시적으로 금지한 공무원 사적 노무 제공 금지 위반, 명백한 국고 손실 횡령 범죄, 의료법 위반이 명확하다”면서 “진정 사과의 뜻이 있다면 누가 무엇을 어떻게 잘못했다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밝히고 `눈 가리고 아웅` 식의 경기도 감사가 아닌 정식 수사에 성실히 응해야 할 것”이라고 촉구했다.
민주당 선대위 관계자는 “판단은 국민의 몫이라 지켜봐야 한다”고 말을 아꼈다. 대선을 한 달 여 앞둔 시점에서 터진 최대 악재를 대하는 이 후보 부부의 사과 태도가 어쩌면 승패를 가르는 분수령이 될 수도 있다. 민심은 때로 사안 자체보다 사안을 대하는 태도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