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멱칼럼] '징비록'에서 배우는 4가지 리더십

by김민구 기자
2015.06.05 03:02:01

[이배용 한국학중앙연구원장] ‘징비록’(懲毖錄)은 서애 유성룡(柳成龍)이 지은 임진왜란 회고록이자 경세서이다. ‘징비’는 ‘내 지난 날을 반성하고 훗날에 근심이 없도록 한다’는 뜻으로 시경(詩經), 소비(小毖) 편에서 따온 말이다. 현재 국보 제132호로 지정돼 있고 사료적 가치는 물론 뛰어난 문장으로 문학적 가치까지 인정받고 있다.

유성룡은 일찍이 학문과 덕행이 뛰어나 퇴계 이황이 “하늘이 낸 사람이다. 장차 나라에 크게 쓰일 것이다”라고 칭찬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23세에 생원시와 진사시 두 시험에 모두 합격하고 25세에 문과에 급제해 관직에 발을 들여 놓았다.

임진왜란 직전 좌의정으로 홍문관 대제학을 겸임하다가 전란이 발발하자 병조판서를 겸임하고 군무를 총괄하는 도체찰사에 임명됐다. 파천 도중에 영의정이 됐다가 반대파 탄핵으로 그날 저녁에 해임됐다. 그는 직책이 없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백의종군하면서 명나라 원군을 맞이해 반격작전을 세웠다.

선조는 도성 함락이 목전에 이르자 한양을 뒤로한 채 북쪽으로 피란길에 올랐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압록강을 건너 요동 망명까지 고려했다. 이때 이를 반대한 사람이 유성룡이었다. 유성룡은 “임금께서 우리 땅을 단 한 걸음이라도 떠나신다면 조선 땅은 우리 소유가 되지 못합니다”라며 눈물로 호소했다. 국가 위기상황일수록 ‘임금-신하-민(民)’이 하나로 뭉쳐야지 국가 리더가 신하와 민을 버리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호소였다.

1593년 11월 선조가 환도한 후 유성룡은 다시 영의정에 오르고 경기·평안·황해·함경도 4도 도체찰사를 겸임했다. 이때부터 그는 전쟁이 끝나기까지 중책을 한 몸에 지고 외교·군사·민정에 힘을 쏟았다. 국가의 큰 위기 속에서도 맡은 일을 흔들리지 않고 수행해 내는 뛰어난 재상의 면모를 보여줬다.

징비록에는 임진왜란 직전 일본 정세와 일본과의 외교 관계, 전쟁에 대비하기 위한 조선의 국방 태세를 비롯해 이순신 장군과 명나라 군의 참전, 강화회담, 정유재란 등 핵심적 내용을 담아냈다. 본인이 직접 눈으로 보고 겪은 일, 귀로 들은 일들을 허심탄회하게 기술해 가슴을 울린다.



징비록의 가치는 일본에도 알려져 1695년 일본 교토에서 간행되기도 했다.

유성룡은 국가 위기를 극복한 리더다. 그의 리더십은 오늘날에도 담아야 할 교훈과 지혜가 있다. 첫번째, 인재등용의 혜안이다. 이순신이나 권율을 기용한 것은 다 알려진 사실이나 인재를 구할 때 폭넓은 시각으로 그 사람의 장점을 부각시키고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해야 함을 강조했다.

두번째, 천심과 민심을 아울러 헤아릴 줄 아는 리더였다. 하늘의 순리와 인심의 가는 방향을 세심히 살펴 전란기에 애민정신을 실천해 백성들을 심리적으로 안정시키려 했다.

세번째, 외교적인 명분과 실리를 동시에 취할 수 있었던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그는 명나라에 원군을 청할 때 구걸하지 않고 임진왜란 원인이 “명나라를 치러가는 길을 내달라”는 일본 요구를 조선이 거절해 일어났다고 주장하고 명의 의리를 지키려다 일본의 침입을 받았기에 명이 조선을 지원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네번째, 그의 리더십 중심에는 항상 충효(忠孝)가 자리잡고 있었다. 언제나 어떤 판단, 결정에도 나라사랑이 우선했다. 개인적 사심을 버리고 살신성인의 대의명분의 자세로 펼친 애국심은 길이길이 역사에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