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하정민 기자
2007.09.15 11:51:34
취임 두달째 맞이한 초유의 사건
`한줄짜리 성명서`로 시장 안정 유도
[이데일리 하정민기자] 1987년 10월 당시 앨런 그린스펀은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에 취임한 지 불과 두 달이 갓 지난 `초짜` 의장이었다. 그러나 초유의 사태와 맞닥뜨렸다. 10월19일 뉴욕 증시 다우존스 지수는 하루동안 무려 22.5% 떨어지는 폭락 사태, `블랙먼데이`를 맞이한 것이다.
그린스펀 전 FRB 의장은 `블랙먼데이` 다음 날인 20일 오전 8시40분 "FRB는 미국 경제와 금융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충분한 유동성을 공급할 준비가 돼 있다"는 한 줄 짜리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 간단하기 그지없는 성명서는 강력한 위력을 발휘했다. 전 세계로 확산된 주가 급락에 브레이크를 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당시 뉴욕 연방준비은행은 공개시장조작을 통해 3개월물 국채 금리를 하루 만에 1.75%포인트 떨어뜨릴 만큼 대규모의 자금을 방출했다. 주가 폭락의 여파로 거래량이 평소의 3배로 증가, 결제자금 마련을 위해 주식을 팔아야 하는 상황에 몰렸던 기관들은 이 덕분에 연쇄 매도를 자제했고 주식시장 역시 빠른 속도로 안정을 찾았다.
많은 전문가들은 그린스펀 전 의장의 성명서가 아니었다면 `블랙먼데이`로 세계 주식시장이 붕괴했을 지도 모른다고 평가하고 있다. FRB 의장으로 임명된 지 불과 70일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는 본능적으로 어떻게 해야 시장을 진정시킬 수 있는지를 알고 있었다는 평가도 된다.
그린스펀 전 의장은 블랙먼데이의 성공적인 대처를 통해 카리스마 넘치는 전임자 폴 볼커 의장의 그늘에서 벗어나, 18년 장기 집권의 발판을 확실하게 마련할 수 있었다.
다음은 그가 회고록 `격동의 시대`에서 `블랙먼데이`에 대해 쓴 챕터의 내용이다.
연준 의장 취임 전 오랫동안 FRB를 드나들었지만, 나는 의장으로 취임하자마자 내가 아직도 배워야 할 것이 많다는 것을 느꼈다. 연준 청사의 문을 여는 순간부터 나의 `깨달음`은 시작됐다.
첫 출근 시 제일 먼저 나를 반겨준 사람은 내 임기 내내 연준의 보안담당자로 일했던 데니스 버클리였다. 그는 나를 `의장님(Mr. Chairman)`이라고 깍듯이 예우했다.
아무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즉각 내 입에서 말이 튀어나왔다. "웃기지 말아요. 데니스. 모든 사람이 날 앨런이라고 부르는 걸 알잖아요." 데니스는 부드럽게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은 그간 연준이 해왔던 방식과 정면으로 배치된다고 설명했다.
결국 나는 두 손을 들 수 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나는 `앨런`이 아니라 `의장님(Mr. Chairman)`이 되었다. 이것은 연준 내부의 깐깐한 규율을 배우는 것의 시작에 불과했다.
내가 연준 의장으로 취임할 무렵 미국 주식시장은 매우 좋은 듯 보였다. 다우 지수는 사상최초로 2000선을 돌파했고, 연초대비 40% 이상 상승한 상태였다. 8월 한 때 2700선을 넘어서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 경제의 속 사정은 좋지 않았다. 로날드 레이건 정권 하에서 미국의 경상적자는 날로 치솟았다. 레이건 대통령 집권 초에 7000억달러였던 미국 재정적자는 1988년 회계연도가 시작된 1987년 10월 2조달러로 세 배 가까이 불었다.
1985년 `플라자 합의` 이후 나타난 달러 약세로 해외 자본의 이탈 현상도 심각했다. 이 와중에 1987년 여름 세계 2~3위 경제대국인 일본과 독일이 잇따라 금리인상에 나서자 달러 자산의 매력도는 크게 떨어졌다.
금리 격차와 쌍둥이 적자라는 미국 경제의 구조적 취약성 때문에 미국 주식시장에는 암운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10월 들어 주식시장의 불안 징후가 점점 뚜렷해졌다.
다우 지수는 10월 첫 주 6% 떨어졌고, 두 번째 주에 추가로 12% 하락했다. 10월16일 금유일 다우 지수는 108포인트 급락했다. 9월 말부터 이날까지 미국 주식시장에서만 사라진 돈이 무려 5000억달러에 달했다. 이에 그 주말 타임 지는 이를 가리켜 `월가의 10월 대학살(Wall Street's October Massacre)`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당시 나는 다음 주 화요일인 20일 아침 텍사스 댈러스 은행가협회에서 연설할 예정이었다. 내가 연준 의장으로 취임한 후 첫 번째로 맞이한 주요 연설이었다.
19일 아침 나는 연준 관계자들에게 "주식시장 상황이 불안해도 댈러스 연설 일정을 취소하지 않겠다"고 공표했다. 내가 일정을 취소할 경우 가뜩이나 불안한 시장이 `연준마저 패닉 상태에 있다`고 우려할 수 있기 때문에 더더욱 일정을 강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19일 주식시장 개장 직후 댈러스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내가 마지막으로 주가 상황을 점검했을 때 다우 지수는 이미 200포인트 떨어진 상태였다. 당시 비행기 안에는 전화가 없어 나는 시장 상황을 계속 지켜볼 수 없었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나를 맞이한 댈러스 연준 관계자에게 나는 시장 상황이 어떠냐고 물었다. 그는 "508(five oh eight) 떨어졌습니다"라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508이라고 할 때 그것은 5.08포인트를 의미한다. 나 역시 다우 지수가 5포인트 떨어졌다고 생각했다.
나는 "아주 잘 됐군. 매우 멋진 랠리야"라고 답했다. 하지만 내가 그 말을 하는 순간 댈러스 연준 관계자의 표정은 매우 어두웠다. 그날 주가 낙폭은 5.08포인트가 아니라 무려 508포인트였기 때문이다. 이는 일일 낙폭으로는 역사상 최고치였다. 1930년대 대공황의 시발이 됐던 1929년 10월29일의 하락률 11.7%보다 훨씬 컸다.
미국 시장의 회오리는 다시 일본, 영국, 독일, 홍콩, 싱가포르, 홍콩으로 확산됐고 전 세계가 공포에 휩싸였다.
호텔로 돌아온 나는 그날 밤 내내 전화기를 붙들고 있었다. 당시 연준 부의장이었던 맨리 존슨은 워싱턴 FRB 청사의 내 자리에 긴급 상황 사무소를 마련해놓고 있었다. 나와 당시 뉴욕 연은 총재였던 게리 코리건을 포함한 지역 연준 총재들은 사태 수습을 위해 분주히 움직였고 토론을 거듭했다.
토론이 끝날 무렵 게리 코리건은 나에게 엄숙하게 말했다. "앨런. 당신은 이 상황의 한 가운데에 있어요. 모든 것이 당신 어깨에 달려있단 말입니다."
전임 폴 볼커 의장과 돈독했던 게리 코리건은 매우 강한 성격의 소유자로 나는 그가 나에게 한 말이 격려인지, 새 의장에 던져준 과제인지 판별하기 어려웠다. 나는 그냥 "고맙소. 코리건 박사"라고 말했을 뿐이다.
호텔로 돌아온 나는 "자. 이제 내가 무엇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지켜보는거야"라고 내 자신에게 거듭 말했다. 나는 침대로 들어가 5시간의 숙면을 취했다.
20일 아침 우리는 간단한 성명서를 내보냈다. 이 와중에 백악관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레이건 대통령의 비서실장인 하워드 베이커가 건 전화였다. 나는 상원의원 출신인 하워드 베이커와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였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응대했다.
내가 "안녕하시오. 상원의원. 무엇을 도와드릴까요?"라고 말하자 그는 한 마디로 "도움(Help)!" 이라고 외쳤다. 대체 어디 있느냐고도 물었다. 나는 "댈러스에 있습니다. 뭐 귀찮은 일이라도 있나요?"라고 답했다.
일반적으로 월가에 비상 상황이 발생하면 백악관에서는 재무장관이 그 일을 담당해 왔다. 하지만 당시 재무장관이었던 제임스 베이커(훗날 아버지 부시 정권에서 국무장관을 역임)는 유럽 출장 중이었다. 하워드 베이커는 재무장관도 없는 상황에서 자신 혼자 이 일을 떠맡기를 원치 않았다.
결국 나는 그의 의견에 동의, 댈러스 일정을 취소하고 워싱턴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나를 위해 베이커 비서실장은 군용기를 보내줬다. 베이커 재무장관 역시 유럽 일정을 취소하고 초음속 여객기 콩코드로 워싱턴으로 돌아오기로 했다.
워싱턴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유동성 지원 의사를 밝힌 한 줄 짜리 성명서를 발표했다. 워싱턴 앤드류스 공군기지에 내렸을 때 나를 맞이한 맨리 존슨 연준 부의장은 뉴욕증권거래소(NYSE)가 한 시간 휴장을 요쳥했다고 보고했다.
나는 그것이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킨다고 생각했다. 나는 "주식시장 문을 닫는 건 투자자들의 고통만 더할 뿐이야.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참사(Catastrophe)야"라고 말했다. 주식거래의 중단은 주식 가격이 사라진다는 것이며, 이는 금융 시스템의 붕괴를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이후 36시간 동안 나는 내가 최소 7개의 팔을 가진 것으로 여길 정도였다. 증권거래소, 시카고 선물거래소, 여러 명의 지역 연준 총재들을 포함해 여기저기서 걸려온 전화를 받는 것 만으로도 숨이 찼다.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한 사람들은 월가 금융기관의 수장들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미국 전역의 금융기관 고위 관계자들을 알고 있었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공포에 젖어 있었다.
그들은 각기 상당한 부, 사회적 지위, 길고 훌륭한 커리어를 가진 사람들이었지만 자신들이 깊은 바닷속으로 추락하고 있다고 여겼다. 나는 "진정해요. 두려움에 처했기 때문에 당신들의 판단이 평소보다 덜 정확할 수 있소."라고 그들을 달랬다.
우리가 20일 아침 발표한 성명서는 "FRB가 월가를 위해 `안전장치(safety net)`를 만들어 줄 것이므로 늘 하던대로 사업을 계속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이는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문처럼 짧고 간명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와중에 특히 월가를 관할하고 있던 코리건 뉴욕 연준 총재가 상당한 역할을 담당했다. 볼커 전 의장 못지않게 카리스마 넘치고 강한 성정을 소유하고 있는 코리건은 이런 역할에 제격인 인물이었다.
게리는 `상어의 이빨`을 가진 월가 사람들에게 맞설 수 있을만큼 충분히 지배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이어서 월가 금융 귀족들을 상대로 계속해서 안심하라는 `명령` 아닌 `명령`을 내렸다. "단지 구체적인 이유도 없이 당신이 다소 불안하다는 이유로 고객들에 대한 대출을 중단한다면 그 댓가를 각오해야 할 것"이라는 것이 그의 논지였다.
`블랙먼데이`가 나타난 그 한 주 동안 코리건은 수 차례 이와 같은 통화를 반복했다.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잘 알지 못하지만 코리건의 전화가 상당히 위압적이었을 것임은 예상할 수 있다.
나는 그의 전화를 받은 사람 중 몇몇이 (코리건의 고함 소리를 듣느라)귀가 부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와 함께 뉴욕 연방준비은행은 공개시장조작을 통해 대규모의 증권을 매입하며 시장에 자금을 풀었다.
베이커 재무장관이 콩코드를 타고 워싱턴으로 복귀한 후 나는 백악관에서 정부 관계자들과 회동을 가졌다. 나는 이번 사태를 초래한 근본 원인이 방만한 정부 재정에 있다며 예산 삭감을 통한 재정적자 감축을 주장했다. 레이건 당시 대통령은 이틀 뒤 기자회견을 통해 이 주장을 받아들였다.
이런 노력들로 인해 시장은 점차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미국 경제도 회복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1988년 1분기 미국 경제는 연율 2% 성장했지만 2분기 성장률은 5%로 대폭 올랐다. 1988년 초 다우 지수는 다시 2000선으로 복귀해 1987년 초와 비슷한 수준을 유지했다. 이후 미국 경제는 7년 연속 성장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