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혹한기 태극기에 담은 '자주 독립의 열망' 보물로 꽃피다

by김은비 기자
2021.08.13 06:00:00

'광복 76주년' 문화재청 태극기 3점 보물 지정 예고
'고종의 외교 고문' 미국인 데니 소장품
3·1운동 때 제작된 진관사 태극기
독립기념관 기증된 김구 서명문 태극기
1883년 공식 사용 후 보물 지정 첫 사례
4괘 위치 달라 '태극기 변천사' 한눈에

[이데일리 김은비 기자] 광복 76주년을 맞아 특별한 의미가 있는 태극기들이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 예고됐다.

태극기에 담긴 독립열망 [그래픽=이데일리 문승용 기자]
문화재청은 광복절인 8월 15일에 앞서 19~20세기 초 제작된 태극기 3건을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할 것을 12일 예고했다. 고종의 외교 고문으로 활동한 미국인 오웬 니커슨 데니(1838~1900)가 소장했던 세로 182.5cm, 가로 262㎝의 대형 태극기인 일명 ‘데니 태극기’와 ‘안창호 유품’ 중 하나로 1985년 3월 독립기념관에 기증된 ‘김구 서명문 태극기’,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제작돼 전해지는 거의 유일한 태극기 ‘진관사 태극기’ 등 3점이다.

최근 끝난 도쿄올림픽을 비롯해 각종 국제 행사에서 태극기는 한국을 상징하지만 태극기 유물이 보물로 지정 예고된 것은 1883년 공식적으로 태극기 사용이 선포된 후 처음이다. 박수희 문화재청 유형문화재과 연구관은 보물 지정 예고에 대해 “이들 태극기는 우리나라 역사 최초로 국기가 만들어지고 변천되는 과정과 독립에 대한 열망이 담긴 문화재로 우리 민족의 상징이라는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라고 의미를 설명했다.

데니 태극기(사진=문화재청)
‘데니 태극기’는 현재 우리나라에 있는 옛 태극기 가운데 가장 클 뿐 아니라 우리나라 국기 제정의 초창기 역사를 보여주는 가장 오래된 태극기다. 개화기인 19세기만 해도 외교활동이 많지 않던 탓에 국기에 대한 필요성을 인지하지 못했다. 우리나라에서 국기 제정에 대한 논의가 처음 있었던 것은 운요호 사건을 빌미로 강화도조약을 체결하던 1876년(고종 13) 이다. 1875년 9월 조선은 강화해협에 불법 침입한 일본 군함 운요호를 포격했다. 일본은 적반하장으로 조선에 ‘엄연히 일본 국기가 게양돼 있는데 왜 포격을 하느냐’며 따졌다. 이를 계기로 조선도 나라를 상징하는 국기를 통해 독립국임을 세계에 알릴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이후 태극기가 어떤 과정을 통해 제정됐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여러 기록에 따라 고종이 태극기를 공식 선포하기 직전 해인 1882년 미국과 수교 과정에서 한차례 논의가 됐고, 같은 해 9월 박영효가 임오군란 수습을 위해 일본으로 가는 배 안에서 에스턴 영국공사, 선장 제임스와 논의해 제작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렇듯 19세기 말 태극기는 대한제국의 외교적 노력을 증명하는 대표적 유물이다. 당시 제작된 태극기는 그 모습을 그리거나 기록한 자료들은 일부 남아 있지만 실물은 ‘데니 태극기’가 유일하다. 데니 태극기 역시 정확한 제작 연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데니가 조선에 마지막에 머무른 게 1890년임을 감안하면 그 이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데니 태극기’는 1891년 1월 데니가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가지고 간 것을 1981년 그의 후손이 우리나라에 기증한 것이다.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김구 서명문 태극기(사진=문화재청)
‘김구 서명문 태극기’와 ‘진관사 태극기’는 일제강점기에 제작됐다. 나라를 잃은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이어진 선조들의 독립에 대한 염원과 우리나라의 정체성을 지켜내려는 간절함을 엿볼 수 있는 유물들이다.



김구(1876~1949)는 1941년 3월 16일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으로 독립의지를 담은 글귀를 태극기에 적어 친분이 있던 벨기에 신부 매우사(본명 샤를 메우스 Charles Meeus)에게 건냈다. 세로 44.3cm, 가로 62cm 크기의 비단 천에 청색과 홍색의 천으로 태극을 만들어 붙이고, 흑색 천으로 4괘를 덧대 정성스레 제작한 태극기다.

김구는 태극기 오른쪽에 ‘망국의 설움을 면하려거든, 자유와 행복을 누리려거든, 정력·인력·물력을 광복군에게 바쳐 원수 일본을 타도하고 조국의 독립을 완성하자’는 서명문을 쓰고 매우사 신부에게 어느 곳에서나 한국사람을 만나는 대로 말을 전해 달라고 호소했다. 유완식 독립기념관 연구관은 “김구와 안창호 등으로 대표되는 일제강점기 해외 독립운동가들의 활동과 한국인들의 광복에 대한 염원을 생생히 엿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간 매우사 신부는 ‘김구 서명문 태극기’를 도산 안창호 선생의 부인 이혜련 여사에게 전했다. 안창호 선생의 후손들이 이를 보관하다 ‘안창호 유품’ 중 하나로 1985년 3월 독립기념관에 기증했다.

서울 진관사 태극기(사진=문화재청)
‘진관사 태극기’는 일장기 위에 태극과 4괘의 형상을 먹으로 덧칠해 항일 의지를 극대화했다. 당시 전국에서는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나와 대한독립만세운동을 벌인 사람들로 가득했다. 계호 진관사 주지는 “당시는 태극기를 꺼내는 것 자체가 어려웠던 시기였기 때문에, 태극기는 더욱 애절하고 처절한 마음이 담긴 상징물”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진관사 태극기’는 만세운동 당시의 치열한 분위기도 추측해 볼 수 있다. 태극기 왼쪽 윗부분 끝자락은 불에 타 손상됐고, 여러 곳에 구멍이 뚫린 흔적도 있다. 태극기는 지난 2009년 진관사의 부속건물인 칠성각을 해체·복원하는 과정에서 태극기에 보자기처럼 싸인 독립신문류 19점과 함께 발견됐다. 학계에서는 3.1운동 직후 비밀 지하신문인 ‘혁신공보’를 발간한 진관사 스님 백초월이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관련해 국내에 밀반입한 자료들과 함께 태극기를 숨겼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번에 보물로 지정 예고된 태극기 3건은 초창기 태극기의 변천 과정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각각 다른 시기에 제작된 태극기는 태극 무늬와 4괘가 있긴 하지만 구체적인 배치, 모습 등은 다르다.

박 연구관은 “고종이 태극기를 사용하도록 선포는 했지만, 세부적인 규격은 정해지지 않았다”며 “이 시기 제작된 태극기를 보면 태극 문양의 구체적 모습이나 사괘의 위치·비율 등은 조금씩 다르다”고 설명했다. 지금과 같은 태극기의 규격과 제작법이 정해진 건 1949년 국기 제정법이 제정되면서다.

한편 문화재청은 이번 ‘데니 태극기’ 등 3건에 대해 30일간의 예고 기간 중 각계의 의견을 수렴·검토하고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보물로 지정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