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사 추격늦춰 시장지배력 확보"..LG화학, 배터리 美소송 '치밀한 셈법'

by남궁민관 기자
2019.05.02 06:00:00

LG화학, 美서 SK이노 ''영업비밀 침해'' 제소
신학철 부회장 직접 입장 표명, 전면전 불사 의지
SK이노 역시 SK 차원에서 공식입장 ''강대강''
"美서 소송, 경쟁사 추격 늦춰 우월한 지위 확보"

LG화학 직원들이 전기차 배러티 생산라인에서 제품을 살펴보고 있다.LG화학 제공
[이데일리 남궁민관 기자] LG화학(051910)이 지난달 29일(현지시간)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와 미국 델라웨어주 지방법원에 SK이노베이션(096770)을 2차전지 관련 ‘영업비밀 침해’로 제소하며 그 배경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그 동안 2차전지 관련 ‘인력 빼내기’ 및 ‘기술 유출’은 지속 이어져왔던 논란이지만, LG화학이 글로벌 주요 시장에서 이같은 소송을 제기한 것은 이례적인 상황으로 평가된다. 최근 전기차를 중심으로 전세계 2차전지 시장이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급성장하고 있는만큼, 자사 인력 및 기술 경쟁력을 보호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풀이된다.

특히 한국이 아닌 미국에서 소송을 제기한 점에서 단순한 의지 표명을 넘어 실질적인 자사의 시장 지배력 보호 움직임을 보인 데 의미를 갖는다. 공정경쟁이라는 대의적 명분 아래 경쟁사의 추격 속도를 늦추는 동시에 시장 수급 상황도 유리하게 끌고 갈 수 있는 치밀하게 계산된 전략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1일 업계에 따르면 LG화학은 미국 ITC에 SK이노베이션이 2차전지 관련 영업비밀을 침해했다는 이유로 셀, 팩, 샘플 등의 현지 수입을 전면 금지해달라고 요청했다. 또 SK이노베이션 전지사업의 미국 법인(SK배터리아메리카) 소재지인 델라웨어 지방법원에는 영업비밀침해금지 및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신학철 LG화학 부회장이 직접 입장을 밝히는 등 LG화학의 공격적인 태세 전환에 먼저 이목이 쏠렸다. 신 부회장은 “LG화학의 2차전지 사업은 1990년대 초반부터 30년에 가까운 긴 시간 동안 과감한 투자와 집념으로 이뤄낸 결실”이라며 “이번 소송은 경쟁사의 부당 행위에 엄정하게 대처해 오랜 연구와 막대한 투자로 확보한 핵심기술과 지식재산권 보호를 위해 불가피한 조치”라고 강조했다. LG화학은 향후 한국에서도 소송을 제기하는 방안도 검토 중으로, 사실상 전면전도 불사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SK이노베이션 역시 SK그룹 차원에서 공식입장을 내놓으며 강대강 대응에 나섰다. SK 측은 “기업의 정당한 영업활동에 대한 불필요한 문제 제기, 국내 이슈를 외국에서 제기함에 따른 국익 훼손 우려 등의 관점에서 먼저 유감을 표한다”며 “SK 배터리 사업은 투명한 공개채용 방식을 통해 국내외로부터 경력직원을 채용해 오고 있으며, 경력직으로의 이동은 당연히 처우 개선과 미래 발전 가능성 등을 고려한 이동 인력 당사자 의사에 따라 진행된 것”이라고 강조했다.



LG화학이 2차전지 관련 SK이노베이션을 미국 ITC와 지방법원에 제소하며 제시한 ‘영업비밀 침해’ 증거. 입사서류에 프로젝트 동료 실명을 작성하게 한 사례.LG화학 제공
SK이노베이션에 대한 LG화학의 불편한 심기는 이미 각사 1분기 실적발표 현장에서 드러났다. 정호영 LG화학 사장은 지난달 24일 기업설명회에서 “일부 경쟁사가 공격적인 가격으로 수주 경쟁에 뛰어들고 있다”며 저가수주 논란에 불을 지폈고, 바로 다음날인 25일 이명영 SK이노베이션 재무본부장은 “저가수주는 외부에서 평가할 처지가 아니며 우리는 경영실적으로 답할 것”이라고 맞받아쳤다.

LG화학은 제소 관련 구체적 증거자료를 제시하며 앞선 저가수주 의혹 제기의 이유를 밝히기도 했다. LG화학이 제시한 한 직원의 SK이노베이션 입사지원 서류에는 LG화학에서 수행한 상세한 업무 내역은 물론 동료 전원의 실명도 기술하도록 돼 있다. 또 입사지원 인원들은 이직 전 LG화학 시스템에서 개인당 400여건에서 1900여건의 핵심기술 관련 문서를 다운로드 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LG화학 관계자는 “SK이노베이션은 이들을 통해 유출된 LG화학의 영업비밀 등을 이용해 선두업체 수준의 자동차용 2차전지 개발에 필요한 시간과 비용을 대폭 절약한 것으로 추측된다”고 지적했다.

특히 LG화학이 미국에서 소를 제기한 것 역시 치밀한 셈법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미국 ITC 및 연방법원은 소송과정에 강력한 ‘증거개시(Discovery)절차’를 두고 있어 증거 은폐가 어렵고, 이를 위반 시 소송결과에도 큰 영향을 주는 제재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또 ITC가 5월 중 조사개시 결정을 내리면 내년 상반기에 예비판결, 하반기에 최종판결이 날 것으로 예상된다. 이 기간 SK이노베이션의 행보는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황유식 NH투자증권 연구원은 “이번 소송 제기에 따라 글로벌 전기차 2차전지 공급증가 속도가 다소 늦춰질 것으로 보이며, 향후 수 년간 타이트한 공급이 이어질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SK이노베이션의 경우 ITC 소송 결과에 따라 생산 제한과 배상 가능성 등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미국과 유럽 배터리 공장 증설 일정이 당초 계획보다 지연될 전망”이라며 “LG화학의 경우 소송 비용은 추가될 수 있으나 경쟁사 추격 속도를 늦춰 배터리 수주 경쟁에서 우월한 지위를 확보하게 되며 제품가격 하락 속도를 늦출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