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멱칼럼]남의 아픔을 대하는 태도가 그 사회의 수준
by송길호 기자
2021.11.19 06:15:00
[박용후 관점디자이너] 누군가 우리 앞에서 심하게 넘어지는 상황이 생기면 주변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이쿠 얼마나 아플까? 다치지는 않았어요?”라고 말을 건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왜 앞을 제대로 보지 않고 걷는거야?”라며 투덜거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과연 여러분은 두 부류의 사람 가운데 어떤 사람과 삶을 함께 하고 싶을까요? 대부분 전자같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고 싶을 겁니다.
남의 감정을 자기 감정처럼 여기는 것을 우리는 ‘공감능력’이라고 부릅니다. 우리 주변에 따듯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공감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 가슴이 따듯해지고 포근해집니다.
얼마전 언론에 아픈 아이를 태워 병원에 가다가 가벼운 교통사고를 낸 엄마를 오히려 사고를 당한 분이 다독거리며 안아 준 어느 여성분의 사연이 소개되었습니다. 바쁜 출근길 사고에도 화를 내기보다는 상대방의 힘든 상황을 먼저 헤아린 가슴 따듯한 이야기였습니다.
이렇게 가슴이 따듯해 지는 광경을 마주하면 우리는 ‘인간답다’, ‘인간적이다’라는 말을 합니다. 저는 이 표현이 아주 평범하게 삶을 살아가는 일반적인 인간의 마음이 어때야 하는지를 잘 나타낸다고 생각합니다. 즉 인간심성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것이죠.
이러한 말들을 연결시켜보면 인간의 삶이 어때야 하는지가 또렷해집니다. 나의 아픔을 헤아리는 것처럼 남의 아픔을 헤아리는 것이 일반적인 인간의 상식적인 삶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우리들의 바램처럼 그렇게 따듯한 사람들만 있는 곳은 아닌 것 같습니다. 남의 아픔이나 고통에 무감각하며 오히려 즐거워 하는 이들도 존재합니다.
‘소시오패스(sociopath)’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전적 의미로는 ‘반(反)사회적 인격장애자’라는 뚯입니다.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쁜 짓을 저지르며, 이에 대해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사람을 뜻합니다. 이렇게 남의 아픔에 공감하는 능력이 떨어지거나 거의 없는 사람들을 만나면 왠지 싫고, 슬퍼집니다.
자신의 성공 이외에 다른 것을 못보는 인간들이 넘쳐나면 사람들의 삶은 황폐해집니다. 남의 아픔을 내 아픔처럼 보는 것이 함께 세상을 살아가는 사회의 아주 ‘상식적인 마음기준’입니다. 이 기준이 깨지면 아픈 사회가 됩니다. 남의 아픔을 보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입니다. 남의 아픔을 못보는 사회는 아픈 사회입니다.
12개 나라에서 100만 명 넘게 참가한 캐나다 교육법이 있습니다. Roots of Empathy(ROE, 공감의 뿌리)라는 이 공감교육 프로그램에 참가한 아이들은 한 아이의 행동이나 표정, 움직임을 보며 그 아이의 감정을 읽어내는 것을 해봅니다. ‘왜 웃을까? 왜 저런 표정을 지을까? 저 아이는 어떤 기분일까?’ 등의 질문과 관찰을 통해 아이의 감정을 읽어내봅니다. 왜 이런 훈련을 하고, 그런 프로그램을 통해 아이들의 공감능력을 높이려고 할까요? 남의 감정을 읽고 배려하는 마음, 바로 공감능력이 사람답게, 인간답게 사는 아주 기본적인 것이기 때문이죠.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공능제’라는 말이 쓰이고 있습니다. ‘공감 능력 제로’를 줄인 말입니다.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은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별로(be not all that, 사람 또는 물건이 그다지 좋지 않다)인 인간’으로 취급받습니다. 어찌보면 인간이라는 존재는 공감을 해야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입니다. 공감능력이 인간다움을 완성해가는 능력인 셈이지요.
인간(人間)이라는 말 자체가 ‘사람 사이’라는 뜻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따라 인간의 가치는 결정될 수 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내가 힘들때 남이 나에게 대해주길 바라는 마음 그대로 상대방을 대하면 됩니다.
당신은 남의 아픔을 마주하면 어떤 말이 먼저 입에서 나올까요? “아! 정말 힘들겠다. 어쩌지?” 이 말입니까? 아니면 그 사람이 들으면 그 사람의 아픔을 헤집는 말이 나옵니까? 그 첫말이 바로 인간다움의 품격을 가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