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新풍속도…미국은 지금 '거대한 퇴사 행렬'

by김정남 기자
2021.11.15 07:05:31

미국 내 '자발적 퇴사자' 사상 최대 행진
9월 자발적 퇴사 443만…3개월째 신고점
취업 후 재택근무 하며 재취업 모색 만연
"임금·복지 혜택 여력 작은 소기업들 심각"
예상 밖 퇴사 행렬에 인플레 공포 더 커져
일각서 1980년대 초 스태그플레이션 우려

(그래픽=문승용 기자)


[뉴욕=이데일리 김정남 특파원] 최근 미국 뉴저지주에 북미 본사를 둔 한국 기업 A사에서는 300명 가까운 인력이 쏟아져 나왔다. 한국 본사에서 특정 사업의 철수를 결정하면서다. 노조가 있는 한국에서는 직원 대부분이 다른 사업부로 재배치됐는데, 고용 시장이 유연한 미국은 그렇지 않았다.

A사에서 퇴사한 후 곧바로 재취업한 B씨는 근무 형태가 특이하다.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주에 위치한 회사로 이직했는데, 사무실로 가지 않고 집에 있는 뉴저지주에서 일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 동부와 서부는 시차가 3시간일 정도로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

더 주목할 건 B씨가 연봉, 연금, 복지 등 조건이 더 좋은 회사를 끊임없이 알아보고 있다는 점이다. 사무실로 출근하지 않고 웬만한 건 화상으로 하다 보니 회사를 옮기는 환경 자체가 수월해졌기 때문이다.

미국의 한 헤드헌터사 고위관계자는 “요즘은 이직을 할 때 사무실에서 일할지, 집에서 일할지 등을 반드시 물어보도록 돼 있다”며 “팬데믹 이후 구인자보다 구직자가 ‘갑’인 시장으로 완전히 바뀌었다”고 말했다. 직장인들이 끊임없이 이직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퇴사가 줄을 잇는 걸 두고 이 관계자는 ‘거대한 퇴사 행렬(Great Resignation)’이라고 불렀다.

미국 고용시장이 급변하고 있다. 고용이 점차 나아질 것이라는 당초 예상을 깨고 이직·퇴사 급증→기업 구인난 심화→임금 상승의 흐름이 지속하고 있다. 코로나19 사태가 낳은 신(新)풍속도라고 부를 만하다.

13일(현지시간) 미국 노동부에 따르면 올해 9월 미국 내 퇴사 규모는 총 621만8000명으로 나타났다. 전월(603만2000명) 대비 18만6000명 늘었다. 지난해 9월(523만5000명)과 비교하면 98만3000명 급증했다.

9월 자발적인 퇴사(해고 제외)는 443만4000명에 달했다. 정부가 구인·이직보고서(JOLTS)를 내놓은 지난 2000년 이후 역대 최대다. 최근 3개월 연속 최대치 기록을 깨고 있다. 최소한 21년 만에 가장 많은 이들이 스스로 회사를 떠나고 있다는 뜻이다. 지난해 9월 당시 자발적인 퇴사 규모는 330만7000명 정도였다.



거대한 퇴사 행렬의 이유는 복합적이다. 코로나19 이후 역대급 돈 풀기로 주식, 부동산 등 자산 가격이 폭등하면서 노동 의욕이 떨어진 게 첫 손에 꼽힌다. 이에 더해 대면 접촉에 따른 코로나19 감염 공포, 재택근무 증가에 따른 이직 용이성 등이 거론된다. 특히 A사의 사례는 코로나19 감염 위험에 상대적으로 더 노출돼 있는 블루 칼라 못지 않게 화이트 칼라가 일하기를 꺼려하는 건 마찬가지라는 방증으로 풀이된다.

이는 기업에는 부담이다. 옥스퍼드 이코노믹스의 리디아 바우수르 이코노미스트는 “기업은 고용 가능한 인력 풀이 크게 줄어 채용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 주재 한 대기업 임원은 “(401K 퇴직연금 등을 비롯한) 복지 혜택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회사는 언제든 인력 유출을 각오해야 하는 분위기가 돼 버렸다”며 “임금 인상 여력이 작은 소기업으로 갈수록 구인난은 심각하다”고 전했다. 현지 헤드헌팅업계 일부에서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보다 일자리 변화 폭이 크다는 분석이 많다.

(사진=AFP 제공)
월가에서는 이같은 구인난이 당분간 이어질 것이라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자발적인 퇴사자 중 상당수는 50세 이상으로 추정되는 만큼 고용 시장에 아예 돌아오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월가 한 금융사의 펀드매니저는 “9월 이후부터는 델타 변이가 잦아들고 등교가 이뤄지며 연방정부 지원이 사라지는 만큼 일자리가 확 늘어날 것으로 봤다”면서 “퇴사자 수가 이렇게 가파르게 늘어날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 인사 역시 코로나19 우려가 지속하는 이상 퇴사 행렬이 내년까지 이어질 가능성을 높게 봤다.

상황이 이렇자 인플레이션 우려는 더 커지게 됐다. 기업의 인건비 상승은 시차를 두고 소비자 판매가격 인상으로 이어진다. 미시건대에 따르면 11월 소비자심리지수 내 향후 12개월 기대인플레이션은 4.9%로 전월(4.8%) 대비 상승했다. 리처드 커틴 미시간대 소비자조사담당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주택, 자동차, 내구재 등의 가격 상승은 지난 반세기 동안 그 어느 때보다 자주 보고되고 있다”고 전했다.

월가 일각에서는 스태그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폭등) 우려까지 나온다. 기업 구인난이 장기화하는 와중에 1980년대 초반 같은 초인플레이션이 닥칠 경우 경제에 미칠 후폭풍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의미다.

(사진=AFP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