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제주용암수' 일등공신…"그냥 생수병에 가치 입혔죠"

by윤정훈 기자
2021.04.28 05:15:00

''히트 제조기'' 배상민 카이스트 사회공헌디자인연구소 교수
오리온 ''제주용암수'' 디자인으로 독일 iF 디자인어워드 수상
카이스트 ‘디지털 뉴딜’ 프로젝트, 이동형 음압병동 등 디자인
사회혁신 디자인 맘놓고 하는 ‘나눔디자인재단’ 만들고파

[이데일리 윤정훈 기자]‘최연소 파슨스 디자인스쿨 교수’ ‘히트 제조기’

배상민 카이스트 산업디자인학과 교수의 수식어다. 최근 대전 카이스트에서 배 교수를 만났다. 자신이 직접 디자인한 검정 두루마기를 입고 나왔다. 배 교수는 “뉴욕에서 공부할 때부터 입었던 옷”이라며 “한국 디자이너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당시에는 ‘검정 갓’까지 쓰고 다녔다”고 설명했다.

배 교수가 걸어온 길은 화려하다. 27세에 세계적 디자인 명문인 뉴욕 파슨스 디자인스쿨의 교수가 됐다. 당시로 최연소이며, 동양인 교수로 유일했다. 이후 교수로 코닥, 3M 등과 일을 하며 히트 상품을 만들어냈다. 코카콜라, 랄프로렌, 샤넬 등 글로벌 기업이 디자인을 맡기기 위해서 줄을 서야 했을 정도다. 그러던 2005년. 그는 13년간의 뉴욕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에 돌아왔다. 당시 만든 것이 지금 재직 중인 카이스트의 사회공헌 디자인연구소(ID+IM)다. 올해로 16년째 ID+IM을 이끌며 디자이너 제자를 양성하고 있다.

배상민 카이스트 교수
올해는 배 교수가 국내로 복귀한지 17년째다. 디자인에 대한 그의 열정과 실력은 더 단단해졌다. 그동안 ID+IM을 통해 받은 세계 디자인상만 50여 개에 달한다. 지금도 삼성, LG, 롯데 등 국내 대기업이 프로젝트를 맡기기 위해 줄 서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기업과의 프로젝트를 꼼꼼하게 선택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배 교수는 “프로젝트를 선정할 때 두 가지 기준이 있는데, 첫째는 사회적 가치를 내는 사회공헌 디자인이면 하려고 한다”며 “둘째는 사회공헌이 아니라도 세상에 처음 선뵈는 디자인이나 업계 트렌드를 선도할 수 있는 프로젝트라면 진행한다”고 설명했다.

최근 배 교수팀이 했던 디자인 프로젝트 중에는 오리온의 ‘제주용암수’ 패키징 디자인이 있다. 제주용암수는 오리온이 생수 시장 진출을 위해 작년에 국내 출시한 브랜드다.

배 교수팀이 만든 생수병은 제주도의 주상절리를 직관적으로 잘 드러낸 디자인으로 화제를 모았다. 이후 독일의 국제 디자인 공모전 ‘iF 디자인 어워드 2020’ 패키지 디자인 부문 본상까지 받았다.

배 교수는 “세상에 없는 디자인을 만들어달라고 오리온에서 요청해서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됐다”며 “이 디자인은 국내 제작 생수병 가운데 제조 원가가 가장 낮지만, 내구도는 750㎏를 견딜 만큼 강하다”고 했다. 이어 “무선인식(RFID) 기술을 활용하거나, 스트로우가 들어간 모델 등 다양한 아이디어가 나왔다”며 “대량 공급을 위한 공정상 이슈 등으로 인해 채택되진 못했지만 연구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고 덧붙였다.



독일 국제 디자인 공모전 ‘iF 디자인 어워드 2020’에서 패키지 디자인 부문 본상을 수상한 ‘제주용암수’.(사진=오리온)
현재는 BGF와 바이오 플라스틱 제품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BGF의 바이오 플라스틱과 항바이러스 기능을 가진 PLA 발포 시트를 활용한 제품 디자인 프로젝트다.

배 교수는 “저희 팀은 물건 하나를 만들어주는 게 아니라, 브랜드 아이덴티티(BI·정체성)를 구축할 수 있는 ‘킬러’ 제품을 만들고, 홍보할 수 있는 방안까지 전체적인 디자인을 제공한다”고 했다. 이어 “편의점에 즐비한 일회용기부터 배달음식, 일회용 커피컵 등 광범위하게 쓰이는 플라스틱을 줄이기 위한 솔루션을 제시했다”며 “BGF가 발포 플라스틱을 활용해 상품화한다면 플라스틱 줄이기에 큰 획을 그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가 진행한 프로젝트가 항상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 시절에 진행한 ‘소외지역 문화박스쿨 운영’(독일 레드닷 어워드 2015 대상 수상) 프로젝트는 빛을 보지 못하고 좌초됐다. 당시 스트레스로 배 교수는 탈모까지 생겼다고 했다.

배 교수는 “평창올림픽 당시 선수 기숙사를 컨테이너 박스로 만들어서 올림픽이 끝난 이후에 아프리카 소외지역에 보내는 국가 프로젝트였다”며 “올림픽을 앞두고 정권이 교체되면서 이른바 ‘적폐 프로젝트’로 낙인찍혀 프로젝트가 사라져버렸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 박스쿨 프로젝트는 작년 하반기 카이스트가 정부 뉴딜 사업으로 진행한 K방역 사업에서 ‘이동형 음압병동(MCM)’ 아이디어로 재탄생했다.

배 교수는 “빛을 보지 못한 아이디어가 코로나19에 이동형 음압병동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토대가 됐다”며 “이외 특정 공간을 자가격리 공간으로 바꾸는 ‘자가격리 키트’ 등을 진행했다”고 소개했다.

배 교수의 최종 꿈은 디자이너들이 맘 놓고 디자인 할 수 있는 나눔디자인재단(가칭)를 만드는 것이다.

배 교수는 “디자이너가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디자인 작업을 하면서 생활을 걱정하지 않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꿈”이라며 “한국의 우수한 디자이너가 사라지지 않도록 제자들을 위해 그런 환경을 만들어 주고 싶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