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계 대세 자리잡은 '젠더 프리 캐스팅', 그 이유는
by장병호 기자
2019.07.08 00:10:00
연극 ''묵적지수''…여자가 왕, 남자가 궁녀
지난해 ''미투'' 이후 성별 무관한 캐스팅 활발
남녀 이분법적 시선 벗어나 ''사람''에 주목
"사회 선입견 바꾸는 예술적 실험의 연장선"
| 남산예술센터 연극 ‘묵적지수’의 한 장면(사진=서울문화재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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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장병호 기자] 지난해 ‘미투’ 운동을 계기로 성폭력·성차별 문제를 바라보는 사회적 인식도 점점 달라지고 있다. 남녀의 성별을 나누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성평등’ 문화에 대한 담론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공연계도 이러한 사회상을 반영해 기존 관습을 깨는 시도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성별과 무관하게 배우를 캐스팅하는 ‘젠더 프리 캐스팅’이다.
최근 서울문화재단 남산예술센터와 달과아이 극단이 공동제작한 연극 ‘묵적지수’가 대표적이다. 극작가 서민준의 제8회 벽산희곡상 수상작을 이래은 연출가가 무대화한 이 연극은 중국 춘추전국시대 초나라를 배경으로 한 전쟁 이야기를 그린다. 등장인물인 초나라 혜왕과 사상가 묵가를 여자 배우가, 궁녀를 남자 배우가 연기해 눈길을 끈다.
이래은 연출은 “희곡에서 등장인물 대부분이 남성인데 이런 남성들의 전쟁 이야기가 2019년에 어떤 의미가 있는 건지 고민하던 중 작년 ‘미투’ 운동 이후 성폭력과 싸워온 여자 배우들이 떠올랐다”고 ‘젠더 프리 캐스팅’을 시도한 배경을 설명했다. 그는 “(여자 배우들에게) 지금까지의 협소한 역할에서 벗어나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는 것이 연출가로서 해야 할 일이다”라고 덧붙였다.
지난 6월 27일 막을 올린 연극 ‘비평가’도 지난해 ‘젠더 프리 캐스팅’을 시도해 화제가 됐던 작품이다. 스페인 작가 후안 마요르가의 희곡으로 극작가와 비평가의 첨예한 논쟁을 그린 2인극이다. 2017년 초연 당시에는 희곡 그대로 남자 배우들이 두 주인공을 연기했다. 그러나 지난해 공연에서 여자 배우 백현주, 김신록이 남성 역할로 열연을 펼쳐 호평을 받았다.
이처럼 연극계가 ‘젠더 프리 캐스팅’을 적극 시도하고 있는 것은 지난해 ‘미투’ 운동의 중심에 연극계가 있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미투’ 운동을 계기로 연극계 안에서 생겨난 고민들이 ‘젠더 프리 캐스팅’으로 이어졌다는 분석이다. 이래은 연출은 “‘미투’ 운동 이후 여자 배우들이 다양한 역할을 맡을 기회가 더 많아지고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다”라고 말했다.
| 연극 ‘비평가’의 한 장면(사진=극단 신작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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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할 부분 중 하나는 이들 작품에서 여자 배우들이 맡는 역할이 왕·사상가·비평가 등 일종의 권력을 지닌 인물들이란 점이다. 김소연 연극평론가는 “아직도 한국 연극계에서 여자 배우가 할 수 있는 역할의 폭은 굉장히 좁다”며 “‘젠더 프리 캐스팅’은 여자 배우들도 남자 배우들처럼 깊이 있고 중요한 캐릭터를 맡아 배우로서의 역량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라는데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뮤지컬도 ‘젠더 프리 캐스팅’이 대세다. 뮤지컬 대표 연출가 이지나가 ‘젠더 프리 캐스팅’에 앞장서고 있다. 이지나 연출이 음악감독 정재일, 안무가 김보라 등과의 협업으로 오는 9월 1일 개막을 목표로 하고 있는 총체극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은 발레리나 김주원과 신예 배우 문유강, 소리꾼 이자람과 배우 박영수·신성민·연준석의 ‘젠더 프리 캐스팅’을 시도했다.
이지나 연출은 뮤지컬 ‘광화문 연가’에서도 월하 역을 남녀 배우가 번갈아 연기하는 더블 캐스팅으로 선보여 화제를 모았다. ‘더 데빌’에서도 차지연·이충주·임병근 등 남녀 배우들이 성별과 관계없이 같은 역할을 맡기도 했다. 원종원 순천향대 공연영상학과 교수는 “이지나 연출의 시도는 다양한 성 정체성을 공연에 적극 반영하려는 가치 있는 실험이다”라고 평가했다.
성평등 담론의 핵심은 남녀의 이분법적 시선을 넘어서 다양한 성을 차별 없이 받아들이자는데 있다. 공연계에서 ‘젠더 프리 캐스팅’이 활발히 이뤄지는 것 또한 있는 그대로의 인간을 무대 위에 그려보인다는 예술 본연의 가치와도 이어진다. 김소연 평론가는 “‘젠더 프리 캐스팅’의 긍정적인 점은 등장인물을 특정 성의 관념으로 보지 않고 한 사람의 ‘인간’으로 보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원종원 교수는 “사회의 선입견을 바꾸겠다는 예술적 실험의 연장선이 ‘젠더 프리 캐스팅’이다”라며 “단순한 성별을 바꾸는 것이 아닌 성 정체성에 대한 편견을 뛰어넘어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까지 포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