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후에도 가족 부양에 허리휘는 한국 노인들

by조선일보 기자
2007.05.23 07:26:36

HSBC그룹 21개국 조사
한국 60대 83%·70대 64% 가족들에게 경제지원 계속
전 세계 평균보다 2배 높아… 손주 돌보는 非경제적 지원도

[조선일보 제공] 은퇴 후 원룸주택 월세를 받아 생활하는 김모(65)씨는 지난해부터 딸네 집에 매달 170만원씩을 부치고 있다. 사위가 사업에 손댔다가 망하고 나서 해외 유학을 결심하자, 딱 1년만 도와 달라는 딸의 부탁을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던 것.
 
김씨는 “당장 생활비가 부족하다는데 부모 된 입장에 모른 척할 순 없지 않으냐”라고 말했다. 도대체 자녀 ‘애프터서비스’는 언제까지 해줘야 하는 걸까? 한국 부모의 숙명일까? 우리나라는 은퇴 후에도 가족에게 경제적인 지원을 제공하는 노인 비율이 전 세계 어느 나라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HSBC그룹이 영국 옥스퍼드 대학과 공동으로 전 세계 21개국의 40~70대 2만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우리나라 60대 83%와 70대 64%가 은퇴 이후에도 가족들에게 경제적인 지원을 제공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일본(60대 17%, 70대 9%)과 홍콩(60대 20%, 70대 11%) 등 다른 아시아 나라보다도 월등히 높고, 전 세계 평균(60대 38%, 70대 30%)의 배를 웃도는 수치다. 가족에 대한 헌신을 중요시하는 한국 정서가 반영되긴 했지만, 그만큼 선진국에 비해 활기차고 즐거운 노후 생활을 보내는 노인들은 많지 않다는 의미다.


우리나라 노인들은 손주를 보살피고, 가사를 도와주는 등 비(非)경제적인 지원을 제공하는 비율 역시 세계 최고 수준인 것으로 조사됐다. 60대의 73%, 70대의 65%에 달했다. 같은 동양권에 속하는 ▲일본(60대 14%, 70대 7%), ▲홍콩(60대 14%, 70대 14%) ▲싱가포르(60대 19%, 70대 20%)보다도 훨씬 비율이 높았다.

교사로 20년간 근무 후 정년 퇴직한 최모(여·65)씨는 2년 전부터 아들네 손주들을 돌보고 있다. 그는 “아들 부부가 맞벌이인데 아이들을 봐달라며 바로 옆집으로 이사 왔다”면서 “친구들도 다들 손주 보느라고 바빠서 동창회를 해도 몇 명 나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한서대학 한정란 교수(노인복지학과)는 “우리나라는 부모 지원 없이는 집 한 채 제대로 사기도 힘들다”며 “국가가 해 주지 못하니까, 부모들이 노후대책은 뒷전으로 하고 자녀부터 돕는 것”이라고 말했다.



‘은퇴 이후 돈 걱정이 되느냐’라는 질문에 대해, 50대 한국인의 50%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이 역시 덴마크(20%), 미국(40%) 등 선진국을 크게 웃도는 수치다. 한국개발연구원 문형표 박사는 “우리나라는 1차 퇴직 연령이 50대 초반으로, 선진국(60세 이후)에 비해 매우 빠른 편”이라며 “일할 수 있는 시간이 짧기 때문에 경제적인 준비 부족에 따른 불안감이 더 클 수 있다”고 해석했다.

정부의 역할에 대한 기대는 큰 것으로 나타났다. 노인에 대한 재정적 지원의 주체와 관련한 질문에 대해 ‘정부가 해야 한다’가 46%를 차지, ‘개인 스스로 해야 한다’(14%)와 ‘가족이 해야 한다’(38%)를 크게 앞질렀다. HSBC는 “개인들이 은퇴에 대한 불안은 큰데, 정작 준비는 제대로 안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은퇴 시기는 언제가 좋으냐’란 질문에는, 한국인 75%가 ‘여건이 허락하는 한 끝까지 일하겠다’고 답했다. 하지만 50대 이후에 실제로 일을 하고 있는 비율은 33%에 불과해 희망과 현실 간 차이가 컸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정경희 고령사회정책팀장은 “한국은 선진국처럼 아직 노후소득을 보장해 주는 시스템을 마련하지 못했다”며 “고령화라는 인구학적인 변화에 맞춰서 사회 구조를 재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은퇴 후 사회 기여도는 한국 노인들이 훨씬 낮았다. ‘주당 반나절 이상 자원봉사 경험이 있느냐’는 질문에 한국 60대는 21%, 70대는 16%만이 ‘그렇다’고 응답, 세계 평균인 30%와 큰 차이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