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습 '태움' 태워버릴 간호법 기대 속 의료계 반대 왜

by이지현 기자
2023.03.07 06:00:00

간호사 업무영역 無 1인당 최대 43명 환자 돌보기도
간호계 "간호대란 막고 의료질 개선 효과 기대" 강조
의협 간무협 등 "직역간의 갈등 분쟁 조장…폐지해야"

[이데일리 이지현 기자] 나는 간호사다. 간호대를 졸업하고 바로 대형병원 병동에 배치돼 말로만 듣던 ‘태움’을 당했다. 이브닝(오후 3~11시) 근무로 오후 3시에 출근해 오후 11시에 퇴근을 해야 했지만, 지시한 일을 마무리하고 가라는 선배 간호사의 말에 새벽 4시까지 일을 계속해야 했다. 오버타임 근무였지만, 추가 수당은 없었다. 말로만 듣던 태움이었다. 부당한 일이 있어도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선배 간호사는 생명을 다루는 일인만큼 규칙이 엄격할 수밖에 없다며 ‘태움’을 당연시했다. 눈물 마를 날이 없었지만, 주변의 얘기를 들으면 나는 나은 편이었다. 다른 간호사는 초임 때 선배에게 슬리퍼로 맞았다. 처음에는 업무를 빨리 숙지하지 못한다고 지적을 받았지만, 나중에는 살이 쪘다고, 못생겼다고 태움을 당했다고 했다. 지방에서 근무하다 이직한 다른 후배 간호사는 첫 월급을 받으면 과에 한턱을 내는 일도 비일비재하다고 귀띔했다. 입사 3년차가 되자 병동 최선임이 됐다. 병동 17명의 간호사 중 절반 이상인 9명이 1년 미만의 신입이다. 이들을 빠른 시일 내에 교육해 1인당 20여명이 넘는 환자를 담당하게 해야 하는 부담이 고스란히 넘어왔다. 업무도 빈틈없이 하면서 병동 관리도 능숙하게 해야 한다는 압박감도 든다. 고된 업무에 가끔 태움의 유혹에 빠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마음을 다잡는 건 아픈 기억 때문이다. 예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간호사의 현실에 답답할 뿐이다. (이 기사는 취재를 바탕으로 1인칭 시점에서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재구성한 내용임)

간호계의 악습인 ‘태움’으로 젊은 간호사들이 목숨을 끊는 일들이 발생하고 있다. ‘태움은 영혼이 재가 될 때까지 태운다’는 의미로, 주로 선배 간호사가 후배 간호사를 괴롭히는 악습을 뜻하는 은어다. 2018년에는 서울아산병원에서, 2019년에는 서울의료원에서 2021년에는 의정부 을지대병원에서 젊은 간호사가 극단적 선택으로 숨진 채 발견됐고 원인으로 ‘태움’이 지목돼 사회적 공분을 사기도 했다.

법원은 최근 을지대병원 판결을 통해 태움은 간호 인력 부족과 장시간, 고강도의 노동 환경이 지속되는 가운데 폭력적인 조직문화가 만들어낸 악습이라고 규정하고 개선이 필요하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현재 모든 의료인을 포괄하는 의료법에는 간호사의 업무 분장을 의사, 치과의사, 한의사의 지도하에 시행하는 진료의 보조와 환자의 간호요구에 대한 관찰, 자료수집, 간호판단 및 요양을 위한 간호 등으로 규정하고 있다. 사실상 의사가 지시하는 모든 업무가 간호사의 업무영역인 셈이다. 이렇다 보니 어떤 병원에서는 의사 부재 시 의사 지시에 따라 처방전을 내기도 하고, 약국이 드문 지역에서는 약 조제 같은 약사의 업무도 병행하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피부과에서는 레이저 시술을, 몇몇 수술방에선 의사 없이 간호사가 수술을 진행한다는 얘기도 나온다. 간호사의 업무 영역에 제한이 없다.

여기에 돌봐야 환자수도 많다. 대한간호협회에 따르면 우리나라 간호사 1명당 환자수는 12~13명이다. 그런데 현장에서는 종합병원 16.3명, 일반병원 최대 43.6명의 환자를 간호사 1명이 돌본다고 토로하고 있다. 국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6~8명, 미국 5명, 호주 4명, 일본 7명을 돌보고 있는 상황을 감안하면 대한민국 간호사는 고강도의 노동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간호사들은 30세 안팎이면 병원을 사직하는 경우가 많아 우리나라 간호사 면허를 ‘7년짜리’로 부르기도 한다. 간호사 면허 10개 중 3개는 장롱 속에 있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간호계는 이러한 업무 부담을 줄이기 위해 만든 것이 간호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간호법’은 간호사가 아니면 누구든지 간호업무를 할 수 없으며, 간호사도 면허된 것 외의 간호업무를 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간호사의 업무영역을 구체적으로 규정함으로써 장시간 고강도 노동 환경 개선을 통한 인력난과 태움 등과 같은 악습 환경도 개선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간호협회 관계자는 “상시적인 간호인력 부족, 만성적인 업무과중 속에 신규 채용된 간호사들이 채 1년을 버티지 못하고 절반이 사직하고 있다”며 “40대가 주축을 이루는 선진국 간호사들과 달리 우리나라는 이직과 사직을 반복하다 경력이 단절되는 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이라고 말했다.



간호법이 통과되면 이러한 간호사들의 극한 상황이 개선될 것이라는 간호계의 장밋빛 전망과 달리 13개 보건단체는 반대하고 있다. 특히 국회 보건복지위원회가 8개월 넘게 법제사법위원회에 묶였던 간호법 제정안을 지난 9일 본회의에 직회부하자, 대한의사협회(의협)가 주축이 된 13개 단체로 구성된 보건복지의료연대는 결사 저지하겠다며 반발하고 있다. 이정근 대한의사협회 상근부회장은 “간호사의 복지와 처우개선의 필요성에 있어서는 충분히 공감하지만, 간호법안이 결코 해답이 될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김대중 대한임상병리사협회 공보부회장은 “간호사독점법과 같은 특정직역에만 이익을 주는 법안은 의료기관에서 함께 일하는 타 보건의료직역들에 상대적 박탈감을 주고 결국에는 분열까지도 초래할 것”이라고 말했다.

강용수 대한응급구조사협회장이 6일 국회와 더불어민주당 중앙당사 앞 1인시위를 하고 있다.(사진=보건복지연대 제공)
의협 등은 간호법 제정안에 들어 있는 ‘의료기관과 지역사회에서 수준 높은 간호 혜택을 받을 수 있게 필요한 사항을 규정한다’는 부분에 우려를 표명한다. 간호사들이 ‘지역사회’란 문구를 근거로 의사의 지도·감독에서 벗어나서 별도의 의료행위를 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간호계는 “의료법과 동일하게 간호사의 업무 범위를 정했기 때문에 지역사회 내용이 포함됐어도 의사의 지도·감독을 벗어나 독자적 진료를 할 수 없다”고 반박한다.

간호조무사들은 간호법이 간호조무사의 응시자격을 고졸로 제한한 부분에 반발하고 있다. 전동환 간호조무사협회 실장은 “간호법이 만들어지면 전문대 등에서 조무사 전문학사를 이수할 경우 아예 간호조무사 시험을 보지 못하게 만들어 선택의 자유를 없애버렸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하지만 간호계는 이것도 사실과 다르다고 반박했다. 간호계 관계자는 “간호조무사의 자격시험 응시 요건을 규정한 법은 새로 제정할 간호법이 아니라 현행 의료법 80조”라며 “이미 의료법에 있는 문구를 그대로 간호법에 가져왔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간호조무사협회는 이미 여러차례 전문대 이상의 교육기관에서의 간호조무사 양성 제도화를 추진했지만, 번번이 좌절됐다. 특히 2016년에는 헌법재판소에서도 이들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전국특성화고와 고등학교 간호교육협회가 강력 반발해서다. 이들은 전문대에서 간호조무사를 양성할 경우 특성화고 출신 학생들의 진로에 악영향을 준다고 주장했다.

입법부 한 관계자는 “사실 간호법이 제정된다고 해서 의료시스템에 큰 변화가 있을 게 없다. 이미 갈등요인이 될만한 문구의 경우 의료법을 준용해 제외한 상태”라며 “결국은 의료기관에서 의사가 할 일, 의료 기사가 할 일, 간호사가 할 일을 나누고 이를 이익중심으로 바라보다 보니 생긴 논란이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