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텐베르크보다 16년 앞선 금속활자 ‘갑인자’ 첫 모습 드러낸다
by김은비 기자
2021.11.02 06:00:00
국립중앙·고궁박물관서 전시
6월 인사동서 금속활자 1632점 발견
1434년 제작...조선시대 인쇄술 엿봐
[이데일리 김은비 기자] 서양 최초로 금속활자와 인쇄기를 발명한 구텐베르크가 성서를 찍어낸 해가 1455년이다.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만든 뒤 유럽에는 인쇄소가 1000곳 이상 생겼으며 성서는 일반인에게까지 널리 퍼졌다. 이는 이후 문예부흥운동, 루터의 종교개혁, 프랑스 대혁명과 영국 산업혁명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과거 인쇄술은 혁명과도 다름없었다.
| | 서울 인사동 땅에서 출토된 한글 금속 활자 세부 모습(사진=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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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구텐베르크보다 78년이나 앞선 1377년 세계 최초 금속활자를 발명해 ‘직지심체요절’을 펴냈다. 이후에도 조선 최초의 금속활자인 계미자(1403, 태종 3년), 경자자(1420, 세종 2년), 갑인자(1434, 세종 16년)등을 만들며 인쇄술을 꾸준히 발달시켰다. 조선 왕조실록에는 실제 갑인자에 대해 “글자가 깨끗하고 바르며 일하기의 쉬움이 예전에 비해 갑절이 됐다”는 내용이 적혀 있어 기술의 발전을 증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석보상절’, ‘자치통감’ 등 인쇄본만 남아있을 뿐 활자 실물이 전해진 것은 전혀 없어 과거 인쇄술 연구에 한계가 있었다. 최근 당시 만들어진 금속활자를 실물로 볼 기회가 생겼다. 국립고궁박물관이 3일부터 공개하는 ‘인사동 출토유물 공개전’과 국립고궁박물관이 지난 9월 30일부터 상설 전시실에서 공개하고 있는 갑인자 금속활자가 그것이다. 구텐베르크보다 약 10여년 이상 빨리 제작된 것으로, 현전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가 처음 발견된 것은 물론 대중에 공개되는 것도 처음이어서 의미가 높다.
조선 전기 금속활자에 관심이 쏠린 건 올해 6월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15~16세기 제작된 금속활자 1632점이 대거 발견되면서다. 땅속에서 발견된 항아리에는 손톱 크기의 정교한 금속활자가 잔뜩 담겨 있었다. 일반인이 살던 지역에서 당시 귀했던 금속활자가 발견됐다는 점에서도 눈길을 끌었지만, 학계에서는 금속활자들은 세종 때 제작된 가장 이른 시기의 한글 금속활자 및 현전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된 한문 금속활자 ‘갑인자’(1434년)가 포함됐다는 점에 더욱 주목했다. 한글 창제의 실제 여파와 더불어 인쇄기술 발달에 힘썼던 세종의 면모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옥영정 한국중앙연구원 교수는 “현전 가장 이른 조선 금속활자는 국립중앙박물관이 가진 세조 ‘을해자’(1455년)로 갑인자는 이보다도 20년 이른 시기”라며 “구텐베르크의 인쇄시기(1450년쯤)보다 이른 시기의 조선시대 금속활자를 확보하게 되는 것”이라고 가치를 설명했다.
문화재청은 하루라도 빨리 연구자와 대중이 금속활자를 볼 수 있도록 유물 발굴 5개월만에 특별전을 열기로 결정했다. 국립고궁박물관 관계자는 “출토 유물을 연구한다는 이유로 늦게 공개하기보다는 연구자와 국민이 빨리 관람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에는 갑인자(1434), 을해자(1455) 등 금속활자 1600여 점을 포함한 발굴유물 전체와 활자를 사용해 찍은 ‘근사록’ 등을 볼 수 있다. 전문가들은 이번 전시를 통해 조선 전기 금속활자 연구가 본격적으로 진행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 | 국립중앙박물관 갑인자 추정 금속활자(사진=국립중앙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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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 유물이 발견되면서 국립중앙박물관에서도 그간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없었던 조선 초기 금속활자의 제작 시기를 ‘갑인자’로 추정할 수 있었다. 박물관이 일제강점기 때 구입한 금속활자로 글자체가 조선 전기로만 추정되고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난 6월 인사동 출토 활자들이 공개되면서 유사한 크기와 모양임을 확인했고, 고 이건희 삼성 회장 유족이 갑인자본 전적인 ‘근사록’을 기증하면서 비교를 통해 글자체가 유사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 활자 가운데 33점의 성분을 분석한 결과 1455년 만든 금속활자인 을해자와 성분이 유사한 것으로 나타나 15세기에 주조한 금속활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박물관 측은 판단했다. 박물관은 이같은 금속활자 152점과 ‘석보상절’ 초간본 2권을 앞서 9월 30일부터 전시하고 있다.
‘석보상절’은 세종 대에 한글 활자로 찍은 초간본이다. ‘석보상절’은 한글로 기록돼 있기 때문에 15세기의 한글과 한자 발음 등을 연구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박물관 관계자는 “‘석보상절’과 갑인자 추정 활자를 보면서 한글과 문화재 기증의 위대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 고 이건희 회장 유족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석보상절 권20(사진=국립중앙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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