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넝마주이’가 이제는 이권사업이 됐다[플라스틱 넷제로]
by김경은 기자
2023.03.05 09:00:00
재활용 산업의 역사 <상>
1990년대 이후 본격적 산업화
30년 지난 지금도 여전히 영세한 재활용 산업
‘이권’ 나눠먹기식 영업방식 문제
[이데일리 김경은 기자] 산업혁명 이전엔 폐기물 관리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인류는 자연에서 물건을 찾아 연마해 다듬어 쓰고, 고쳐 쓰고, 다시 썼다. 남은 음식은 가축 먹이로 주거나 모아서 퇴비로 활용하곤 했다. 도시 청소의 시작은 일제강점기 40∼50곳에 거지들이 모여 살며 동냥과 넝마주이로 연명했던 것이 시작이다. 넝마주이는 헌 옷이나 폐품 등을 주워 모으는 일이나 그런 일을 하는 직업인을 가리킨다. 품행이 천박하고 못된 짓을 일삼는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인 ‘양아치’는 이들을 가리킨 ‘동냥아치’의 줄임 말이다.
산업화가 이루어지던 1960년대, 부랑아였던 넝마주이에 대한 사회적 차별과 정부의 감시·관리가 시작됐다. 당시 넝마주이는 근로재건대에 등록을 해야만 넝마주이 활동을 할 수 있었고, 넝마주이가 등록을 하지 않고 폐품을 주워다 팔면 정비와 단속, 격리 대상이 됐다. 거대한 쓰레기 산이었던 난지도 매립장을 중심으로 판자촌을 형성해 거주했던 이들은 1990년대 이후 난지도매립지 운영 중단과 1995년 쓰레기 종량제 봉투 제도를 계기로 국가가 재활용 산업에 개입하면서 폐품산업의 성장과 함께 점차 사라져 갔다. 넝마주이는 사라졌지만 이들 중 일부는 재활용 업체로 성장해 사업을 대물림하고 있다.
| 난지도는 1978년부터 15년간 1천만 서울시민들의 쓰레기매립지 역할을 해오면서 8.5t 트럭 1300만대 분의 세계 최고(해발98m)의 쓰레기 산으로 바뀌었으며 파리, 먼지, 악취의 삼다도로 불리우며 환경오염의 주범인 메탄가스와 침출수 등이 흐르는 불모의 땅이었다. 1996년부터 안정화 사업을 추진한 결과, 다양한 동식물이 살 수 있는 생명의 땅으로 복원되어 2002년 5월 월드컵공원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난지도 매립장 모습/사진=서울의 공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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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폐기물 처리는 이렇게 1980년대까지는 재활용 기술이 미흡하고 소각시설도 적어 대부분 단순 매립에 의존했다. 그러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전후로 생활수준이 급격히 상승하면서 쓰레기 처리는 처치곤란의 사회문제로 대두했다. 경제개발이 본격화되자 생활오물을 청소하고 매립과 노천에 마구 버려진 폐기물 처리 문제가 대두하기 시작한 것이다. 국민 1인당 쓰레기 발생량은 지금보다 2배나 많은 하루 2㎏을 넘기기도 했다. 이에 정부와 지자체는 위생매립장과 소각장 건설에 박차를 가했으나 님비현상으로 쉽지 않았다. 자원순환과 쓰레기 감량에 초점이 맞춰진 ‘재활용’ 중심 폐기물 정책이 도입되기 시작했다. 폐기물관리법을 전면 개정해 1992년 ‘자원의 절약과 재활용촉진에 관한 법률’이 제정됐고, 1995년 전국 단위 쓰레기 종량제가 전 세계 최초로 도입됐다.
원인자부담원칙에 따른 종량제는 쓰레기 감량이 주된 목표였다. 그러나 결과는 달랐다. 수거량 감소보다 재활용품 분리촉진에 더 큰 영향을 미쳤다. 서울시 공식통계에 따르면 종량제 실시 이후 1996년 매립지 반입량의 18.7%, 재활용품 수거량의 31% 그리고 총수거량의 8.4%가 감소했다. 이를 제도 실시 이전의 총수거량 감소 효과까지 감안하면 실질적인 총수거량 감소폭은 4.4%로 추산, 사실상 쓰레기 감량에 미친 영향은 미미했다.
급작스럽게 늘어난 재활용 폐기물이 문제로 대두하기 시작했다. 우리사회의 오피니언 리더로 활약해온 고(故) 이정전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는 당시 이를 ‘쓰레기 종량제의 파문’이라고 일갈했다. 쓰레기 종량제가 예상외의 방향으로 흘러가면서 재활용체제 문제가 그대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는 “재활용체제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은 상태에서 너무 서둘렀다”고 꼬집었다. 종량제 실시 후 분리수거된 재활용가능 폐기물이 쏟아져 나왔지만 이를 보관할 집하장도 태부족이었다. 재활용 산업의 준비도 미흡해 재활용 폐기물이 심하게 적체됐던 것이다. 당시 이 같은 문제의 원인으로는 환경부 등은 재활용 산업의 영세성을 꼽았다. 이 교수는 더 나아가 폐기물 재활용에 응분의 대가를 지불하지 않은 탓이라고 분석했다. 1992년 생산업자에게 회수·처리비용을 부담케 했던 예치금제도가 2003년 생산자에 재활용 책임까지 부과하는 생산자책임재활용제(EPR)로 바뀌면서 선별·재활용 업체의 주요 수익기반은 공적 성격을 가진 EPR 분담금이 됐다.
이같은 국가의 개입으로 2000년대 이후 쓰레기 발생량은 1980년대에 비해 반으로 줄었고, 쓰레기 수집운반 수단도 기계화됐다. 매립장은 위생매립시설로 탈바꿈되고 소각시설에선 소각 폐열을 에너지화하는 시설로 대체됐다. 30년간 쓰레기 매립률은 94.6%에서 15.9%(2012년 기준)로 줄고, 재활용은 1.4%에서 59.1%로 증가했다. 2000년 초까지는 이렇듯 소비자 분리수거 의무와 생산자 재활용 책임을 강화하는 양대 정책인 종량제와 EPR제도 같은 굵직한 정책의 도입으로 재활용률이 가파른 성장을 보인 ‘성장기’였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성숙기에 진입하면서부터는 재활용 부문은 정체기 국면을 맞고 있다.
특히 지난 30년간 바뀌지 않은 것이 하나 있으니, 바로 우리나라 재활용 산업의 ‘영세성’이다. 근본 원인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채다.
1995년~2003년간 8년새 재활용 업체수는 1550개에서 3009개로 ‘2배’ 늘었다. 시장규모는 2조원에서 5조원으로 연평균 12% 증가했다. 그러나 종업원 50인 이하가 97% 이상이고, 매출액 10억원 미만이 88%를 차지한다. 이는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크게 변화가 없다. 2021년 폐기물재활용 업체수는 6720개, 종업원 50인 이하가 96.4%, 매출액 10억원 미만이 75.9%다. 그나마 자본재 투자가 가능한 매출액 500억원 이상 업체는 50곳으로 전체의 0.7%에 불과하다.
아직 하나의 산업이라기엔 역부족이다. 폐기물 산업에 대한 부정적 인식 등으로 재활용 산업은 경제활동의 가장 말단에서 폐쇄적으로 존재해왔다. 일부는 감시를 피해 불법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쓰레기산 방치와 폐기물 불법수출 등으로 국제적 망신을 산 이유다. 판을 바꿀 새로운 규제와 신규 플레이어의 진입에 대한 저항이 거세 업계 정화도 쉽지않다. 환경부 자원순환국은 민원 탓에 험지 중 험지로 꼽힌다. 의료 폐기물을 환경부로 이관할 당시 자원순환과장이었던 이찬희 한국포장재공제조합 이사장은 한 사석에서 “집으로도 불량배들이 협박 전화가 와서 가족들이 걱정이 많았었다”고 기자에게 당시를 전하기도 했다. 사회적 책임경영을 준수하려는 의지는 희박하다. 재활용 산업에 혁신기술 접목과 대규모 투자는 다소 먼 이야기로 보인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유리병, 플라스틱, 페트병, 종이, 비닐, 캔, 스티로폼 등 약 7가지 내외의 품목을 직접 분리배출한다. 전 세계에서 이처럼 분리배출을 세분화한 나라는 한국이 거의 유일하다. 분리배출을 해서 내놓으면 그 이후는 알아서 처리 될 줄 알았다. 그런데 폐기물 산업으로 넘어오면 애써 분리배출한 것이 한데 섞여 무용지물이 되기도 한다. 재활용 생태계를 알고 난 이후 시민들이 허탈감을 호소하는 지점이다.
재활용품이 최종 재활용 단계에서 제대로 처리되지 않는 원인은 이권배분식 EPR 제도 운영도 한 원인으로 지적된다. 최근 품질별 분담금 차별화가 도입되긴 했으나, 오랜 기간 무게에 따라 분담금이 배분되어 왔다. 재활용 업체들은 제품의 품질보다 무게를 늘리면 돈을 버는 구조다. 그 결과 여전히 국내에선 폐플라스틱에 대해 재질별 자동화 분류가 가능한 곳이 거의 없다. EPR 제도 개선과 재활용 산업 투명성 강화, 산업 고도화 지적은 꾸준히 이어지고 있지만 여전히 해법은 난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