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부터 이윤택까지… 문화계 ‘미투’ 곪은게 터졌다

by이정현 기자
2018.02.19 06:00:00

성추행 논란 이윤택 연출, 19일 공개사과
''간접사과''에 비난여론 들끓어
이어지는 폭로 … "자성해야"

연극연출가 이윤택(사진=연합뉴스).


[이데일리 이정현·장병호 기자] “곪았던 병폐가 결국 터졌다.”

성폭력 범죄를 고발하는 ‘미투’(metoo, 나도 같은 경험을 당했다는 뜻) 운동이 문화계에서 걷잡을 수 없는 파장으로 번지고 있다. 시인 고은, 배우 이명행에 이어 연극연출가 이윤택의 성범죄 의혹이 연달아 불거지면서 논란이 들불처럼 퍼지고 있는 상황이다.

극단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인 이윤택 연출은 19일 오전 자신의 성범죄 혐의와 관련해 공개적으로 사과할 예정이다. 지난 14일 김수희 극단 미인 대표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10여년 전 이윤택 연출로부터 성추행을 당한 사실을 폭로한 뒤 유사한 피해를 겪었다는 주장이 이어지자 이같이 결정했다.

◇이윤택 연출 연이은 폭로…성폭행 의혹도

이윤택 연출은 김수희 대표의 폭로 이후 잘못을 인정하고 연희단거리패와 30스튜디오, 밀양연극촌 등 자신이 맡고 있던 예술감독직에서 모두 물러나 근신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연극계는 이윤택 연출이 피해자에게 직접 사과하지 않고 연희단거리패를 통한 ‘간접사과’를 하고 있다며 비판을 이어왔다.

지난 17일에는 이윤택 연출로부터 두 차례에 걸쳐 성폭행을 당했다는 폭로가 나와 충격을 안겼다. 김보리(가명)씨는 인터넷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 연극·뮤지컬 갤러리에 ‘윤택한 패거리를 회상하며’라는 글을 올려 “이윤택 연출로부터 19세이던 2001년, 20세였던 2002년 두 차례에 걸쳐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김 씨 외에도 연희단거리패 활동 당시 이윤택 연출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는 폭로가 쏟아지고 있다.



연극 단체도 행동에 나섰다. 한국극작가협회는 이날 “이윤택 회원을 제명한다”고 밝혔다. 한국극작가협회는 “‘미투’ 운동에서 밝혀진 이윤택의 권력을 악용한 사태를 묵과할 수 없다”며 “본 협회의 이름으로 한 문화예술위원회 심의위원 추천 건도 철회한다”고 덧붙였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도 이윤택 연출의 성범죄 사건에 대해 진상규명과 수사를 촉구하는 청원이 올라왔다. 18일 오후 1시 기준으로 동의 인원 1만여 명을 넘어섰다.

이윤택 연출과 연희단거리패는 한국 연극계를 이끌어온 대표적인 연출가와 극단이다. 1986년 부산에서 창단한 연희단거리패는 1988년부터 서울 공연을 단행하며 ‘산씻김’ ‘오구’ ‘바보각시’ ‘어머니’ 등의 작품으로 한국 연극의 새로운 공연 양식 흐름을 주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연극계는 그동안 굵직한 존재감을 남겨온 연출가와 극단에서 불거진 성범죄 의혹에 큰 충격을 겪고 있다. 연극인들의 자발적 토론공동체인 ‘대학로X포럼’에는 이윤택 연출에 대한 성범죄 피해를 폭로한 피해자들에 대한 응원과 지지의 메시지와 함께 연극계의 고질적인 병폐에 대한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있다.

◇문화계 추가 피해 사례도…논란 계속될 듯

이번 논란으로 문화계가 그동안 내부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한 것을 반성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연극연출가 김재엽은 이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통해 “결과적인 것만으로 평가 받는 연극계의 관행 속에서 불합리한 과정과 반인권적인 폭력을 감내해온 수많은 연극인들의 고통에 무관심했던 것이 인정투쟁에 목말라하는 우리의 모습이었다”고 지적했다. 이어 “인정투쟁에서 살아남을 연극 한 편을 완성시키기 위해 연극 공동체가 무너지는 것도 무시해온 우리의 연극이 과연 정당한 연극이었는지 거듭 자문하게 된다”고 덧붙였다. 이은경 연극평론가는 “연극은 팀워크가 중요시하다 보니 위계질서를 내세워 내부적인 문제를 관습화해온 분위기가 있다”며 “성추행 등 피해를 받았다고 해도 활동에 지장이 생길까 주저한 이들이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 평론가는 “이번 논란을 시발점으로 연극계에 자성하는 목소리가 나올 것으로 기대하며 이같은 문제를 방지할 수 있는 구조적인 변화를 이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연계에서는 이윤택 연출에 앞서 배우 이명행에 대한 성추행 논란이 불거졌다. 이명행은 최근 성추행 논란으로 연극 ‘거미여인의 키스’에서 중도하차했다. 이후 이명행의 성추행 추가 폭로가 나오면서 ‘미투’ 운동이 공연계 전반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페이스북 등 소셜미디어에는 이들 외에 또 다른 성추행 피해 사례가 올라오고 있어 ‘미투’ 운동의 여파는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앞서 문단 내 성폭력 문제로 논란에 휘말린 시인 고은은 경기도 수원시가 광교산 자락에 마련한 주거 및 창작공간 ‘문화향수의 집에서 떠나기로 결정했다. 고은 시인은 18일 고은재단 관계자를 통해 “더 이상 수원시에 누가 되길 원치 않는다”며 “올해 안에 계획해둔 장소로 이주하겠다”는 뜻을 수원시에 전달했다. 고은 시인은 시인 최영미가 문단 내 성폭력 문제를 폭로한 시 ‘괴물’의 주인공으로 지목돼 곤혹을 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