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異잡지] 色.味.音으로 정상의 마음 움직인다

by피용익 기자
2014.08.22 06:12:00

[이데일리 피용익 기자] ‘정상회담’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서밋(summit)’은 원래 산의 꼭대기를 뜻한다. 이 단어를 외교에서 처음 사용한 것은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로 알려져 있다. 그는 1950년 2월14일 연설에서 소련과의 최고위층 회담을 제안하면서 “정상에서의 회담으로 사태가 더 악화될 수 있다는 말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다. 1953년 5월11일에는 “각국이 정상에서 평화의 의지를 다지자”고 역설했다. 이 단어가 외교가에서 통용되자 미국 국무부는 1955년 정식 외교용어로 채택했고, 지금은 전세계에서 사용하고 있다.

정상회담은 단순히 두 최고지도자의 친교 자리가 아니다. 말 그대로 물러설 곳 없는 산꼭대기에서의 한판승부와도 같다. 환영식에서부터 양자회담, 다자회담, 기자회견, 만찬에 이르기까지 두 정상은 각자의 국익을 위해 서로를 공략한다. 발언 하나하나는 물론 의상, 음식, 음악, 선물까지도 전략이다.

◇ 패션쇼? 의상도 전략이다

미국 퍼스트 레이디인 미셸 오바마가 중저가 브랜드 ‘제이크루(J Crew)’의 원피스를 입고 방송 토크쇼에 출연해 대중의 호감을 얻었던 일화는 유명하다. 이는 ‘패션정치’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퍼스트 패밀리’가 입는 옷은 그 자체로 메시지로 읽힌다.

박근혜 대통령은 패션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에 익숙하다. 주요 경제 행사에 참석할 때 ‘투자활성화복’이라고 이름붙인 빨간색 재킷을 입는 것이 대표적이다. 정상외교 때도 마찬가지다. 일각에선 박 대통령의 해외순방을 ‘패션쇼’에 빗대기도 하지만, 알고보면 상대국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 연출된 의상이다.

박 대통령은 취임 후 첫 미국 방문 때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속한 민주당을 상징하는 파란색 재킷을 입었다. 중국에 갔을 땐 중국인이 좋아하는 붉은 색, 황금색 옷을 착용했다. 베트남에선 ‘월남치마’로 불리는 일자형 통치마를 입은 채 전용기에서 내려왔다. 이른바 TPO, 즉 시간(Time)과 장소(Place), 상황(Occasion)에 따른 상대국 배려다.

박 대통령이 TPO를 지키지 못하는 실수를 한 적도 있다. 지난 4월25일 오바마 대통령 방한 때다. 박 대통령은 방미 때와 마찬가지로 파란색 재킷을 입었다. 평소라면 문제가 없었겠지만, 세월호 침몰 사고 직후란 점에서 논란이 됐다. 세월호 참사를 애도하기 위해 짙은색 정장을 입은 오바마 대통령과 대조되며 논란이 커졌다.

◇ 음식에는 메시지가 있다



지난 2월 백악관에는 비상이 걸렸다.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에게 베풀 국빈만찬을 앞두고서다. 만찬을 총괄하는 미셸 오바마 여사와 백악관 주방 담당자들은 만찬주와 건배주 선택에 평소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프랑스가 와인의 종주국이다보니 생긴 일이다. 백악관의 선택은 캘리포니아 나파밸리의 2011년산 ‘라 프로포시옹 도레’, 워싱턴주 컬럼비아밸리의 2009년산 ‘체스터-키더 레드 블렌딩’, 버지니아주의 ‘티보 제니슨 브뤼’였다. 모두 프랑스인이 직접 투자하거나 프랑스의 기술 전수를 받은 와이너리에서 생산한 제품들이다. 정치전문지 폴리티코는 “와인 종주국인 프랑스에 대한 예우를 갖춘 것”이라고 평가했다.

박 대통령도 청와대에서 열리는 만찬에 많은 공을 들인다. 백악관이 자국산 식재료로 만든 음식을 대접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것과 달리 청와대는 경우에 따라 상대국에서 생산된 재료로 만든 음식을 내놓는다. 오바마 대통령에게는 미국산 안심 스테이크를, 토니 애벗 호주 총리에게는 호주산 스테이크를 대접하는 식이다. 이는 양국 협력관계를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상대방의 기호를 파악해 음식을 준비하는 것은 기본이다. 박 대통령은 지난 7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에게 만찬을 베풀면서 “시 주석께서 양고기를 좋아하신다고 해서 양고기를 준비했다”고 말했고, 시 주석은 거듭 감사를 표시했다.

◇ 감동을 더하는 음악은 필수

정상외교의 하이라이트로 꼽히는 만찬에서 음악은 필수다. 한·호주 정상 만찬 때 청와대는 가야금 연주를 준비했다. 애벗 총리가 가야금 연주에 취해갈 무렵 연주된 곡은 다름 아닌 호주의 전통민요 ‘왈츠를 추는 마틸다(Waltzing Matilda)’였다. 애벗 총리는 이국 땅에서 낯선 악기로 연주된 익숙한 음악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회고록 ‘마이 라이프(My Life)’에서 김영삼 정부 때인 1993년 7월 방한 당시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그는 “연무관에서 수영하는 동안 엘비스 프레슬리부터 재즈까지 내가 좋아하는 곡들이 나왔다. 한국의 후한 환대의 사례”라고 썼다. 클린턴 전 대통령의 방한을 앞두고 외교부가 그의 취향을 철저하게 조사한 결과였다.

음악에 신경을 쓰는 것은 외국 정상들도 마찬가지다. 박 대통령이 지난해 6월 중국을 국빈방문했을 때 만찬장에는 박 대통령이 좋아하는 노래인 ‘그대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이 나왔다.

그러나 음악도 때와 장소가 맞아야 한다. 지난 4월 오바마 대통령 방한 때는 세월호 참사 직후 국가적 애도 분위기를 고려해 음악이 없는 가운데 실무회담을 겸한 만찬이 진행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