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오-정동영의 워싱턴 날갯짓

by노컷뉴스 기자
2009.03.14 10:04:42

[노컷뉴스 제공] '왕의 남자' 이재오의 귀환과 '올드 보이' 정동영의 컴백...

한 때 장안의 화제가 됐던 영화의 제목이 두 사람의 귀국 발표와 함께 다시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고국행을 상징하는 '왕의 남자'와 '올드 보이'의 정치적 뉘앙스는 제목만큼이나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두 사람의 귀국이 불러 올 한나라당과 민주당내 역학구도의 변화와 정치적 파장을 가늠해 볼 수 있게 하는 표현인 것 같다.

지난해 봄 총선에서 패배한 뒤 한 달 간격을 두고 미국으로 건너왔던 두 사람이 이제는 같은 달에 귀국행 비행기를 타게 됐다. 한나라당 이재오 전 의원은 10개월, 정동영 전 통일부장관에게는 9개월의 '정치적 유랑기(流浪期)'였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이번 주 하루 사이를 두고 워싱턴특파원들과 기자간담회를 가졌다.

북한의 핵프로그램과 미사일 발사 움직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을 둘러싼 미국 정부의 변화기류, 또 미국의 경제 위기등이 특파원들의 최대 관심사지만 두 유력 정치인의 인간적인 소회를 듣는 것도 빼놓을 수는 없었다.

사실 자의반 타의반으로 한국을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유력 인사들에게 워싱턴은 외로운 곳이고 정치적으로는 음지(陰地)다. 식물이 햇빛을 받아야 엽록소를 만들 수 있는 것처럼 정치인의 생존에 필수적인 자양분은 국민의 관심이다.

때문에 국민의 시선에서 비껴나 있는 워싱턴은 정치인에게는 '식물의 광합성'이 불가능한 음지이며 동시에 '민심이 천심'이라는 진리를 새삼 깨닫게 해주는 곳이기도 하다.

또 한편으로 정치인이든 관료출신이든 거의 대부분 '아픔'을 경험한 전직(前職)인사들에게 워싱턴은 '부활의 날갯짓'을 위한 소중한 둥지가 되기도 한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1998년말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잃고 이듬해 조지워싱턴대에서 객원연구원 신분으로 미국에 머물 때 허름한 단칸방에서 TV포장 박스를 식탁 삼아 부인 김윤옥 여사와 함께 밥을 먹었던 때가 있었다.



이재오 전 의원은 지난해 겨울 어느 추웠던 날 아침 버지니아주의 한 운전면허시험장에서 건물 밖으로까지 길게 줄지어 선 사람들의 행렬에 끼어있다 기자와 우연히 마주 친 뒤 계면쩍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정동영 전 장관의 부인 민혜경 여사는 남편의 운전비서를 자임하며 노스캐롤라이나주와 워싱턴D.C를 오갔고, 워싱턴의 한 대학 강연에서 두시간 가까이 '되는 영어-안되는 영어'를 써가며 한반도 통일정책을 역설하던 정 전 장관의 모습도 이제는 추억이 됐다.

기자가 미국에서 만난 두 유력 정치인 이재오-정동영은 너무 겸손했고 낮은 자세였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꿈을 잃지 않고 있었다. 사실 꿈이 없었다면 미국 땅을 밟지도 않았으리라...

미국 생활을 마친 이 전 의원은 한국에 돌아가면 '나의 꿈 조국의 꿈'이라는 제목의 자서전을 출간하고, 자신의 '동북아 평화번영 공동체' 구상을 가다듬는 작업에 주력하겠다면서 대북특사 자격으로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만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미국에서 체류하는 동안 라면을 수없이 먹었다는 그는 조심스럽게 차기 대권의 꿈을 내비치기도 했다.

정동영 전 장관은 "13년 전 설레는 마음으로 처음 정치를 시작했던 곳에서 새롭게 출발하겠다"면서 4.29 재선거의 전주 덕진 출마 선언과 함께 정치 활동을 본격 재개했다.

두 사람의 이같은 정치적 판단에는 정치인이기에 앞서 그들만의 인간적인 고뇌와 외로운 세월의 더미가 깔려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전 의원의 귀국에는 한나라당내 친이-친박의 권력다툼, 정 전 장관의 귀국에는 민주당내 신-구 세력간 파워게임이 예고돼 있다.

특히 정동영 전 장관의 경우는 자신의 출마선언에 따른 거센 비난을 한 몸에 떠안으며 외로운 미국 유랑에 이어 또다시 정치적 외로움을 곱씹어야만 할 것 같다.

민주당 대선후보로 나서 540만표의 역대 최대 표차로 정권을 빼앗긴 데 따른 정치적, 도의적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당내 비판은 물론 대다수 언론들도 그의 재선거 출마선언에 부정적인 시각을 나타내고 있다.

이재오, 정동영 두 사람은 모두 미국 생활을 통해 예전보다 훨씬 넓어진 시야와 가슴을 갖게 됐다고 말하고 있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워싱턴 날갯짓'에 후한 점수를 주는 것 같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