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블루칼라]갈 곳 잃은 퇴직 엔지니어

by이재호 기자
2015.12.28 06:00:00

해외 나가도 일거리 없어
중동 이직 1년 만에 귀국

[이데일리 이재호 기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울산 석유화학단지에서 32년 간 근무한 뒤 퇴직한 이성복(53)씨는 지난해 초 중동의 한 정유사로 이직했다가 최근 회사를 그만두고 귀국했다. 저유가로 해당 기업이 원유 정제시설 가동을 줄이면서 할 일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씨는 이제 진정한 의미의 은퇴자가 됐다.

글로벌 경제의 불확실성 확대라는 거시적 변화가 국내 블루칼라 근로자들의 노후 안정성 약화로 이어진 ‘나비효과’의 사례다.

정유와 석유화학, 조선 등의 업종에서 수십년 간 노하우를 쌓은 숙련된 블루칼라 엔지니어들은 해외 기업들의 주요 스카우트 대상이었다.

실제로 지난해 말에는 사우디아라비아 최대 국영 석유기업인 아람코가 국내 정유 및 플랜트 업계 엔지니어 수십명을 파격적인 조건으로 영입한 바 있다. 아람코 외에도 수많은 기업들이 국내 블루칼라 근로자들의 가치를 인정하며 자리를 만들어주고 있었다.

특히 정년 퇴직을 한 근로자들에 대한 선호도가 높았다. 현직 엔지니어보다 인건비는 저렴하지만 경험치는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아람코의 경우 현직 엔지니어에게는 연봉 2배 인상, 호텔급 숙소, 자녀 교육비 등을 약속했지만 퇴직한 엔지니어에게는 기존 연봉 수준을 제공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유가 변동성이 확대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중동 국가와 글로벌 메이저 석유기업들이 석유 개발 및 시추, 정제시설 확대사업에 부담을 느끼면서 투자를 줄이기 시작했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정년 퇴직한 뒤 중동으로 건너가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엔지니어들이 많았지만 유가가 계속 떨어지면서 최근에는 이미 이직했던 엔지니어들까지 돌아오고 있는 상황”이라며 “당분간 이같은 기조가 이어질 것”이라고 전했다.



조선업계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2010년대 들어 최대 먹거리로 떠올랐던 해양플랜트 수주가 끊기면서 관련 엔지니어들의 경우 해외 이직은 커녕 현재 몸담고 있는 직장에서도 구조조정 여부를 걱정해야 할 처지가 됐다.

삼성중공업(010140)의 해양플랜트 수주액은 2013년 89억 달러에서 올해 61억 달러로 31.4% 감소했으며 현대중공업(009540)과 대우조선해양(042660)은 올해 수주 실적이 한 건도 없다.

울산과 거제, 포항 등 고소득 블루칼라 근로자들이 많은 지역에서는 그동안 관심 밖이었던 임금피크제가 노사 갈등을 초래할 새로운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60세 정년을 보장받아 왔지만 최근 기업들의 실적이 악화하면서 정년을 채우는 대신 임금 하락을 감수해야 할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한 석유화학 기업 임원은 “울산의 정유·석유화학 기업들은 일찌감치 미국식 경영 방식을 받아들여 블루칼라 엔지니어들에 대한 대우를 높여왔다”며 “국내 최대 정유사인 SK에너지의 경우 1960년대부터 정년 60세를 보장해 온 만큼 임금피크제는 남의 나라 얘기일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조선사 노조들도 임금피크제 도입 방식 및 시기를 놓고 사측과 이견을 보이고 있다.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조선사들이 최악의 실적을 기록하면서 임금피크제 도입 압력은 더욱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