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의 벗 전세 60년 흥망성쇠史
by박종오 기자
2013.02.27 06:35:00
경제성장기 내집장만 수단으로 각광
90년대 중반에 전체주택 30% 차지하기도
집값 하락에 공급 급감..전세 종말론 부상
[이데일리 박종오 기자]안녕. 내 이름은 ‘전세’야. 멋지게 영어로 소개를 하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불가능하네. 난 토종 한국산이라 영어 이름이 없거든. 다른 나라엔 내가 없고 월세만 있대.
수수께끼를 하나 내볼게. 나는 왜 한국에만 있을까? 이 질문에 대답하려면 내 출생의 비밀을 알아야 해. 사실 이건 최근 날 찾아보기 어렵게 된 이유와도 깊은 관련이 있어.
| ▲고(故) 신상옥 감독의 1961년 작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한 장면. 과부집에 하숙하게 된 선생과 옥희 어머니의 미묘한 로맨스를 그린 작품으로 최초의 전세는 이와 유사한 유형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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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공개석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한국전쟁 직후인 1955년, 유엔(UN)의 도움을 받아 최초로 실시한 인구총조사 자료에서였어. 당시 기록에 ‘차가(借家)’라는 주거유형이 있었거든. 집을 빌려 쓴다는 의미로, 전세의 옛말이었을 거라는 게 통계청 담당자의 설명이야. 단독주택의 사용하지 않는 사랑방과 문간방을 임대해줬던 거지.
그 시절엔 전체 380만 가구 중 22만여 가구(5.88%)가 차가를 살았다고 해. 지금의 월세인 ‘셋방’이 당시 40만8723가구였던 것과 비교하면 절반 수준이었지.
◇집값 상승기 자금조달 수단으로 각광
본격적으로 내 덩치가 커진 건 1970년대 중반부터야. 경제성장과 아파트공급 증가, 뛰는 집값 그리고 당시의 금융환경이 맞물린 결과였지.
1976~1979년은 중공업 육성과 수출 드라이브, 중동 건설 붐 등 한국이 고도성장하던 시기야. 국내총생산(GDP) 실질성장률이 연평균 11%에 달했어. 살림살이가 핀 서민들은 좋은 집에 살고 싶었고 민간 건설사들은 아파트 건설로 호응했어. 그 결과 1975년 9만여 가구에 불과했던 아파트는 1980년 들어 약 37만가구로 400% 이상 증가했지.
난 부자를 꿈꾸는 서민들의 발판으로 각광받게 돼. 그땐 아파트를 분양받으면 큰 이익을 남길 수 있었어. 집값이 빠르게 오르고 있었거든. 문제는 아파트를 사고 싶지만 돈을 빌릴 곳이 없었다는 거야. 은행이 기업에만 돈을 빌려줬을 뿐 가계금융은 등한시했거든.
| ▲역대 예금은행 여수신 금리 추이와 주택자금 대출비중 추이 (자료제공=한국은행 및 현대경제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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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사람들은 내 역할에 주목하게 돼. 새 아파트를 전세주면 전세보증금을 집값에 보탤 수 있다는 걸 깨달은 거지. 세입자에게 집을 빌려주는 대신 주택구입을 위한 무이자 대출을 받는 셈이야. 임대인은 빌린 돈으로 집을 사 시세차익을 얻고, 임차인은 저렴한 비용으로 새 아파트에 살 수 있었어. 모두가 행복했지.
◇집값하락에 타격..전세 종말론 ‘부상’
물론 좋았던 시절만 있었던 건 아니야. 계속된 집값 상승과 대규모 재개발로 인해 1990년엔 최악의 전세대란이 찾아왔어. 한해 동안 세입자 17명이 전세금 폭등을 못 이겨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 또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엔 집값과 전셋값이 20~30% 동반 폭락했어. 집주인이 세입자에게 전세금을 돌려주지 못하는 ‘역(逆)전세 대란’이 벌어졌지.
굴곡을 겪으면서도 집값이 계속 오른 덕분에 난 꾸준히 몸집을 불려왔어. 그러다 1995년을 정점으로 쇠퇴기에 들어섰어.
김대중 정부가 외환위기 이후 경기부양을 위해 소비자 금융을 대폭 확대하면서 서민들도 은행에서 집살 돈을 빌리기가 쉬워졌지. 국내에 첫 장기모기지 상품이 등장한 것도 이 때야. 노무현 정부 땐 기준금리를 3~4%대로 묶어놓은 탓에 예금 금리가 떨어져 집주인들이 전세보증금을 은행에 넣어도 받을 수 있는 이자가 줄어들면서 전세 대신 월세로 바꿔타는 집주인들이 늘기 시작했어.
지난 2010년부터 이어진 주택시장 침체가 결정타였어. 집값이 떨어지니 과거처럼 날 끼면서까지 집을 사야할 이유가 사라진 거야.
많은 사람들은 이제 ‘전세의 종말’을 얘기해. 집값 차익을 전제로 한 나 대신 매달 임대수익을 받는 월세가 대세가 될 거라는 거지. 사실 임대시장에서 월세주택의 비중은 이미 2010년에 날 따라잡았어. 지금도 그 덩치가 계속 커지고 있다고 하더군.
물론 아직은 나도 좀 더 버텨볼 만해. 은행의 대출문턱은 여전히 높고 우리에겐 자식에게 전세금을 물려주는 관습이 있으니까. 하지만 존재감이 희미해지는 건 어쩔 수 없어. 조만간 세계 어디서도 내 모습을 볼 수 없게 되는 때가 올 테지.
난 언젠가 사라지겠지만 어려웠던 시절 여러분 곁을 지켜온 든든한 동반자였다고 자부해. 부디 좋은 모습으로 날 기억해주길. 그럼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