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기의 미국in]그들이 '뉴요커'이길 거부하는 이유

by이준기 기자
2020.06.14 07:31:34

가뜩이나 높은 세금·물가에…재택근무 확산도 한몫
2018~2019년 2년간 700만명 도시→외곽·농촌 이주
'공화 강세' 농촌, '민주 지지층' 유입으로 희석 가능성

뉴욕 맨해튼의 아파트. 사진=AFP
[뉴욕=이데일리 이준기 특파원] “코로나19 사태 이후 도시의 명성은 쇠퇴할 것이다.”

이데일리와 인터뷰에서 밝힌 니콜라스 블룸 미국 스탠퍼드대 경제학 교수의 예언이 현실화하는 걸까.

최근 들어 뉴욕 등 미국 내 대도시를 떠나는 미국인들이 늘고 있다. 미국을 뒤흔든 코로나19 사태는 대도시가 전염병에발생시 ‘최악의 장소’라는 것을 고스란히 드러냈다는 점에서다. 이 같은 대도시 엑소더스는 미국의 정치지형까지 흔들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전통적으로 외곽·농촌 지역에서 강세를 보이는 공화당 색채가 ‘민주당 지지층’이 많은 도시민의 유입으로 희석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그동안 미국에서 도시는 특별했다. 특히 세계의 수도인 뉴욕은 더욱 그러했다. 브로드웨이 ‘쇼’를 즐고 양키스·닉스 등 프로 스포츠에 열광했다. 세계적인 박물관과 고급 레스토랑, 바에서 뉴요커로서의 일상을 한껏 뽐냈다. 높은 세금과 물가는 충분히 감당할 몫이라고들 했다. 물론 위기도 있었다. 2001년 9·11 테러 사태는 일부 뉴요커들의 이탈을 촉발했지만 그 분위기는 몇 년 가지 못했다. 이내 사람들은 다시 ‘뉴요커’가 되고자 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코로나19 사태와 이로 인한 락다운(봉쇄·lockdown)은 사람들을 도심 속 아파트 안에 수개월간 몰아넣었고, 이들은 드디어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했다.

멀딘이코노믹스의 젤드 딜런 투자전략가는 9일(현지시간) 블룸버그통신 기고문에서 “유명한 도시의 작은 아파트에 갇히고 싶은 사람은 더는 없을 것”이라며 “사람들은 밀폐된 도시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것의 불확실성, 특히 이 바이러스와 싸울 백신이 없는 상황에서 더는 견디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불가피한 ‘세금 인상’은 도시에서의 탈출을 부추기고 있다. 빌 더블라지오 뉴욕시장은 2014년 취임 이후 200억달러를 들여 3만명 이상의 시공무원을 늘리는 등 확장 재정 영향으로 뉴욕을 비롯한 대도시의 예산은 바닥이 났다. 여기에 주(州) 세 및 지방세 공제가 제한되면서 사실상 ‘증세’가 이뤄진 2017년 말 세제개혁 이후 도시인들의 삶은 더욱 팍팍해져갔다. 미 인구조사국에 따르면 2018~2019년 2년 간 주(州) 내 도시에서 교외 지역으로 이주한 주민은 240만명, 아예 다른 주로 이주한 주민은 470만명으로 집계됐다. 최근 코로나19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천문학적인 예산을 퍼부은 만큼 탈출러시 규모는 더욱 커질 것으로 관측된다.

재택근무 확산도 탈(脫)도시 움직임에 한몫하고 있다. 모건스탠리의 제임스 고먼 최고경영자(CEO)는 “은행을 (사람들의) 발자국 없이 운영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고 했다. 로이터통신은 미 대기업협회가 인사담당 임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4명 중 3명 이상이 코로나19 위협이 가라앉은 후에도 더 많은 직원이 재택근무를 계속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뉴욕과 같은 생활권인 주변 코네티컷주로의 부동산시장은 다시 뜨거워지고 있다고 지역신문사인 ‘스탬퍼드 애더버킷’은 최근 보도했다. 이 매체는 “높은 세율과 재정 부실 등으로 주민 이탈 현상을 겪었던 코네티컷주에서 지난 몇 주 동안 뉴욕시를 탈출하려는 사람들이 단독주택을 얻기 위해 즉석에서 호가를 지불하는 모습이 현실화하고 있다”고 썼다.

딜런 투자전략가는 “사람들은 과거에 생각지 못했던 남쪽 지역에서 사는 걸 기꺼이 고려할 것”이라며 “그들은 그들의 아이들이 뛰어놀 마당이 있고, 더 큰 공원과 나무들이 있는 더 큰 공간에서 살게 될 것인데, 이는 모두 도시에서 지불하는 것보다 훨씬 적은 금액”이라고 했다.

주목할 부분은 이 같은 대도시 이탈 현상은 미 정치판에 적잖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이다. 뉴욕을 비롯해 인구 밀도가 상대적으로 높은 도시 지역에선 야당인 민주당 지지 성향이 두드러지는 반면, 공화당의 우세 지역은 인구 밀도가 낮은 외곽이나 농촌 지역이 주를 이룬다. 지금과 같이 도시에서 교외 외곽지역으로의 이주 현상이 지속할 경우 공화당 강세는 자연스레 힘을 읽을 수 있다. 2018년 11월 미 중간선거 당시 전통적으로 공화당의 ‘텃밭’으로 여겨지는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 공화당의 헨리 맥메스터 주지사 후보가 민주당 후보를 불편할 정도로 근소한 차이로 당선된 것이 대표적이다.

미 NBC방송은 미국의 2020년 인구조사에서 수집된 인구 데이터를 인용해 10개 주의 의회 의석이 바뀔 것으로 내다봤다. 텍사스·플로리다·애리조나·몬태나 등 인구밀도가 낮은 주에서의 의석은 늘어나는 반면, 캘리포니아·뉴욕·일리노이·미시간·펜실베니아 등 상대적으로 인구밀도가 높은 주는 의석을 잃을 것이라고 NBC방송은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