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계 최대 큰손' 홍라희 퇴장이 의미하는 것

by오현주 기자
2017.03.07 00:15:16

삼성미술관 리움·호암미술관장직 사퇴배경 관심
재력·실력·안목 갖춘 보증수표 '영향력 1위'
남편 와병중 아들 구속 겹치자 결심 굳힌 듯
"집안일 해결되지 않는 한 복귀하지 않을 것"
후임 미정…동생 홍라영 총괄부관장 체제로

지난해 9월 30일 고액 기부자 모임 ‘레드크로스 아너스 클럽’ 출범식에서 참석한 홍라희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 미술계의 ‘큰손’인 홍 관장이 6일 돌연 삼성미술관 리움과 호암미술관 관장직을 사퇴하자 그 배경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이데일리 오현주·윤종성 기자] 미술에 관심이 있든 없든 대한민국 국민 대부분에게 존재를 각인시킨 그림이 있다.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1964)이다. 2008년 ‘삼성 비자금 특검’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행복한 눈물’은 당시 환율로 87억원. 이외에 96억원쯤 되는 프랭크 스텔라의 ‘베들레헴 병원’(1959) 등이 거론되자 세상은 비자금 자체보다 상상을 초월하는 그림 한 점 가격에 요동을 쳤다.

그 소란의 중심에 홍라희(72)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이 있었다. 홍 관장은 그해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 비자금 조성 의혹 폭로로 출범한 특검에 소환돼 비자금을 이용해 600억원대 고가미술품을 구입한 의혹으로 조사를 받았다. 결론은 무혐의 처분. 하지만 결과와 상관없이 홍 관장은 삼성미술관 리움을 비롯해 호암미술관 관장, 삼성문화재단 이사직까지 내려놨다. 이후 복귀까진 3년이 걸렸다. 2011년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경영일선에 돌아오면서 다시 관장으로 나섰다.

6일 홍 관장이 또다시 삼성미술관 리움과 호암미술관 관장직을 사퇴하겠다고 밝혔다. 6년 만이다. 미술계는 “사실상 완전한 은퇴가 아니겠느냐”며 술렁이고 있다. 이번에도 결정적 계기는 특검이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삼성이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의 공범으로 몰리고 아들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구속되는 초유의 사태를 맞자 사퇴를 결심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름 석자가 ‘명작’…수년간 미술계 영향력 1위

홍 관장의 미술계 영향력은 막강하다. 이름 석자가 ‘명작’이고 행보 자체가 ‘보증수표’다. 미술을 전공(서울대 응용미술학과)한 홍 관장은 재력은 물론 실력과 안목까지 갖춘 ‘큰손 컬렉터’로 꼽혔다. 미술계가 벌이는 각종 설문조사마다 ‘영향력 1위’도 놓치지 않았다. 말 그대로 ‘미술퀸’이었다.

홍 관장이 미술계에 본격적으로 나선 건 1995년. 시아버지인 이병철(1910∼1987) 전 삼성그룹 회장이 1982년 경기도 용인에 세운 호암미술관의 관장직을 맡으면서다. 9년 뒤인 2004년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국내 최대 규모의 사립미술관인 삼성미술관 리움을 개관하면서부터는 두 미술관의 관장직을 동시에 맡아 왔다.



호암미술관에서 숨 고르기를 한 뒤 삼성미술관 리움의 운영에 뛰어든 홍 관장은 고미술과 현대미술의 투 트랙을 유지해 왔다. 보통 미술관이 어느 하나로 색깔을 잡는 것과는 달랐다. 그럼에도 미술계는 홍 관장의 취향이 시아버지와는 달리 현대미술에 가깝다고 말한다. 2008년 ‘삼성 특검’으로 드러난 이른바 ‘홍라희 컬렉션’에 유독 미국 현대미술가가 많이 포함됐던 것도 이를 방증한다.

소장품 또한 혀를 내두를 정도다. 삼성미술관 리움의 소장품은 개관 당시 1만 5000여점을 넘긴다고 알려졌다. SK·대림·금호 등 기업 미술관 중 최고일 뿐만 아니라 그즈음 국립현대미술관 본관이 소장한 7460점보다도 많았다. 양뿐만이 아니다. 고려청자부터 조선백자, 분청사기, 불상까지 국보급도 다수다. 리움과 호암을 합쳐 152점.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국보 제216호), ‘고구려반가상’(국보 제118호), ‘청자진사주전자’(국보 제133호) 등을 소장하고 있다.

△“집안일 해결되지 않는 한 복귀 않을 듯”

지난 2년여 동안 홍 관장은 미술관 운영에만 전념하는 듯했다. 하지만 지난달 17일 이재용 부회장이 구속된 후 “참담한 심정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다”고 말해온 것으로 전해졌다. 홍 관장의 사퇴를 두고 삼성 안팎에서는 삼성 쇄신의 일환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결국 홍 관장이 개인 의지로 내린 결정이란 시각이 지배적인 이유다.

삼성의 한 관계자는 “2008년에는 비자금 조성 등에 몰려 본의와 무관하게 물러났다면 이번에는 남편이 투병 중이고 아들이 구속되는 등 가족사로 더이상 관장직을 수행하기 어려워진 것”이라면서 “집안일이 해결되지 않는 한 복귀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홍 관장의 후임은 정해지지 않았다. 삼성미술관 리움의 경우 당분간 홍 관장의 동생인 홍라영(57) 총괄부관장이 맡아 운영할 것으로 보인다. 2008년 ‘삼성 특검’ 당시에도 홍 총괄부관장은 관장직을 공석으로 유지한 채 3년여간 미술관을 운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