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안근모 기자
2004.03.07 11:23:35
[edaily 안근모기자] 우리금융(053000)그룹 차기 회장 후보로 단수 추천된 황영기 삼성증권 전 사장은 삼성그룹의 핵심에서 잔뼈가 굵은 국제금융 전문가이다.
자신을 `지면 죽는 검투사`로 비유했던 그가 삼성그룹에 사표를 내고 바깥 길에 나선 것은 이번이 두 번째. 두 번 모두 그는 삼성그룹의 차주(借主)에서 삼성그룹에 대한 대주(貸主)로 변신하는 묘한 공통점이 있다.
삼성그룹 영어경시 1위 차지하며 그룹 핵심에 진입
서울고와 서울대 무역학과를 졸업한 그는 지난 1975년 삼성물산에 입사, 잡화무역 업무를 담당하다 그?영어경시대회에서 1등을 차지하면서 두각을 나타내, 77년 10월 당시 이병철 회장 비서실 국제금융팀에 들어가며 금융 전문가로서의 길을 걷게 됐다.
삼성에 첫번째 사표..차주(借主)에서 대주(貸主)로 첫번째 변신
그룹 핵심에서 해외 투자은행들과 활발히 접촉하며 국제금융 전문가로서 차츰 인정을 받게 됐지만, 전문적 지식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그는 삼성그룹에 첫번째 사표를 제출하며 영국 런던정경대(LSE)로 유학길에 올랐다.
런던에서 재무관리를 전공하며 국제금융을 집중적으로 익힌 그는 81년 귀국해 파리바은행과 뱅커스트러스트은행에서 대기업을 상대로한 기업금융 영업을 하게 됐다. 차주(借主)에서 대주(貸主)로 위치가 바뀐 셈. 86년부터는 뱅커스트러스트 도쿄지점 국제자본시장부 아시아담당 부사장으로 일하며 선물 옵션 스왑 등 파생상품 마케팅을 주로 했다.
삼성그룹 복귀, `신경영` 핵심으로
외국계 투자은행 외도를 마친 뒤 삼성에 복귀한 것은 89년 5월. 그는 친정인 회장 비서실의 국제금융팀장을 맡아 92년 국제증권을 인수한 뒤 삼성증권을 발족하는 작업을 주도했다.
신경영 원년이었던 93년에 회장 비서실 인사팀장으로 발령된 것을 보면 그가 삼성그룹으로부터 얼마나 신망을 받았던지를 알 수 있다.
이후 삼성전자 자금팀장, 삼성생명 전략기획팀장(전무)을 거쳤던 그는 99년 8월 삼성투신운용 사장직을 맡으면서 증권업계과 직접적인 인연을 맺게 된다. 대우사태 직후 최대의 투신권 위기상황이었던 당시 그는 삼성투신운용과 삼성생명투신운용을 합병하며 정면돌파, 능력을 다시 인정받으면서 지난 2001년 6월 삼성증권 사장이 됐다.
삼성증권 사장 취임 "나는 지면 죽는 검투사"
취임직후 약정경쟁 중단을 선언해 증권가에 화제가 됐던 황 사장은 자신을 `싸움에서 지면 죽는 검투사`에 비유, 약정 1위를 내주더라도 수익원 다변화를 통해 반드시 진정한 1위가 되겠다는 의지를 밝히기도 했다. "최고경영자(CEO)는 검투사와 같다. 나도 검투사라는 심정으로 변화에 대응하고 있다. 지면 죽는 만큼 검투사와 같은 자세로 반드시 이기는 싸움을 할 것이며, 어떻게든 이길수 있도록 고민하고 방법을 찾아 낼 것이다."
"노선버스식 영업으로는 안돼"
삼성증권 사장 시절이던 지난 2002년 3월 그는 당시의 증권업계 영업 방식을 `노선버스`로 비유하며 차별화를 강조했다. "노선버스는 차별화된 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한다. 승객들이 정류장 앞에 서서 아무 버스나 타면 되는 것이다. 앞으로 증권사들은 먼저 차별화 된 서비스를 통해 고객에게 선택의 폭을 넓혀줘야 한다."
삼성에 두번째 사표.."금융업은 자산획득 전쟁"
삼성그룹 복귀 15년만에 그는 4일 삼성그룹에 두 번째 사표를 제출했다. 삼성그룹 주채권 은행을 휘하에 둠으로써 그는 그룹과의 관계가 다시 뒤바뀌게 됐다.
증권사 사장이기 이전에 금융인으로서 2년여전에 예고했듯이 그는 이제 본격적인 `자산획득 전쟁`에 나선다. "국내 증권영업은 은행이나 보험에 비해 개인고객에 대한 기반이 매우 취약하다. 이런 상황이 지속될 경우 자산획득전쟁(Asset Gathering War)에서 질 수 밖에 없다. 금융업은 결국 신뢰를 바탕으로 고객자산을 누가 더 많이 획득하느냐에 따라 성패가 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