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R&D 칼바람을 뚫는 법
by강민구 기자
2024.01.02 06:15:00
말 많던 2024년도 정부 연구·개발(R&D) 예산이 26조5000억원으로 확정됐다. 이는 당초 정부안 25조9000억원보다 6000억원 늘어난 것으로, 비R&D로 재분류된 1조8000억원 등을 빼면 전년대비 2조8000억원(8.9%) 삭감된 규모다. 어쨌든 33년 만에 R&D 예산 삭감이라는 힘든 상황을 맞이한 과학기술계는 걱정 속에 2024년을 준비하고 있다.
그런데 R&D 예산이 확정된 후에도 언론에서는 이번 예산의 정책 방향보다는 삭감 배경에 더 관심을 보이고 있다. 정부에서는 세계 최고의 R&D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군살을 빼 선택과 집중을 하려는 것이라고 애써 설명하고 있는데, 이런 논란이 지속돼 자칫 과거의 틀에 갇혀 2024년을 제대로 시작해 보지도 못할지 걱정이다. 여하튼 이번 논란은 정부가 예산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삭감 이유에 대해 합당한 설명과 과학계의 동의를 구하지 못해 단초를 제공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시련이 닥쳤을 때 ‘왜 그랬는지, 누구 탓인지’ 따지고만 있으면 해결될 일은 아무것도 없다. 지금 세계는 기술패권경쟁 속에서 초격차 기술을 확보하기 위해 그야말로 총성 없는 전쟁을 하고 있다. 정부의 잘잘못을 가리는 것보다 급한 것은 차제에 비효율을 찾아내 없애고 세계적인 R&D 경쟁력을 갖추는 것이다.
정부 R&D 예산은 1992년부터 2023년까지 32배나 증가해 총 규모면에서 선진국에 필적할 정도로 늘어났다. 그사이 우리나라는 1인당 GDP가 4배로 증가했고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으로 올라섰는데, 이는 정부의 집중적인 투자와 과학자들의 노력의 결실이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오늘의 이 논란은 예산이 급증하는 과정에서 R&D 시스템을 제때 혁신하지 못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다.
1991년 설립된 싱가포르의 난양공대는 2023년 QS 세계 대학 랭킹에서 전 세계 19위를 차지, 서울대(29위)와 KAIST(42위)를 앞질렀다. 이러한 급성장의 배경에는 외국계 총장 영입을 통한 과감한 대학 개혁이 있다. 전임 안데르손 총장은 취임 후 연구성과가 낮은 대학교수 30%를 잘라내고, 세계적인 석학들을 대거 유치했다. 미국 국립과학재단 총재를 역임한 현재의 수레쉬 총장은 2018년도에 부임한 후 테뉴어의 비율을 30~50%로 낮추고, 테뉴어를 받더라도 물갈이가 가능토록 하는 등 개혁의 고삐를 더욱 죄고 있다. 난양공대는 교수진의 70% 이상, 석·박사 학생의 60%가 외국인이고, 기업에서 기부금을 받으면 정부가 1.5배를 매칭하는 형태로 R&D 예산을 지원하여 산학협력을 유도한다. 우리나라의 대학과 출연연이 이런 대학을 어떻게 이길지 두렵기까지 하다.
그나마 미래 세대 과학자들이 마음껏 도전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해외 대학·연구기관·기업들과 국제공동연구를 활발히 해 R&D 경쟁력을 높여야 희망이 보인다. 다행히 이번 국회 심의에서 학생연구원 등 젊은 연구자 지원이 확대됐고, 글로벌 R&D 예산 1조8000억원도 유지됐다. 그러나 대부분의 연구현장은 감내하기 힘들 정도로 예산이 삭감돼 고통이 클 것으로 예상된다.
어렵지만 이제는 과학자들이 나서서 새는 곳이 없는지 알뜰하게 샅샅이 살피고 적은 예산이지만 최대의 연구 성과를 낼 수 있도록 효율화해야 한다. 정부에서도 미래에 대한 투자는 계속된다는 확고한 의지를 보여줘야 과학자들은 내년에는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혁신에 박차를 가할 것이다. 그리고 과거에도 그렇듯 이번에도 털고 일어나 보란 듯이 성과를 낼 것이다. 정부는 과학자들을 최고로 위했던 1960~70년대가 그립다는 그들의 절규에 귀 기울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