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조? 난 책임없소 그림 산 당신이 조심했어야"

by오현주 기자
2018.04.11 00:12:00

50년간 미술시장 휘저은 위조자의 고백
세계 명화 위조·판매로 엄청난 부 축적
기술·거래 외에 미술시장 커넥션도 폭로
"위작 위험은 위조자 아닌 구매자 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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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작 × 미술시장
켄 페레니|이동천 역|424쪽|라의눈

‘천재적인 미술품 위조자’로 모습을 드러낸 저자 켄 페레니가 1992∼1993년에 그린 마틴 존슨 히드의 시리즈 ‘브라질의 보배’ 중 한 점. 페레니는 이 19세기 미국화가의 작품을 위조하는 데 유독 공을 들였다(사진=라의눈).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지난해 여름. 이탈리아 제노아의 두칼레미술관에서 아메데오 모딜리아니(1884~1920)의 특별전이 열렸다. 기다란 목, 눈동자 없는 여인의 초상으로 유명한 그 화가 맞다. 그런데 전시 중에 황당한 얘기가 나돌기 시작한다. 전시작 중 위작이 적지 않다는. 소문은 사실이 됐다. 60여점의 전시품 중 3분의 1이 ‘진짜 위작’으로 드러난 거다. 전시는 조기폐막하고, 배신감에 사로잡힌 10만여명의 관람객은 집단으로 입장료 반환소송을 냈다.

유럽까지 날아갈 것도 없다. 한국 상황은 더욱 극적이니까.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는 작가이름도 달지 못한 ‘미인도’가 1년여째 유리막 안에 고독하게 걸려 있다. “내 그림이 아니다”란 천경자 화백과 “당신 그림 맞다”는 미술관의 27년에 걸친 다툼이 아직 진행 중이다. ‘위작화가는 징역 3년, 화랑주는 징역 7년 형’을 받았는데도 여전히 자신의 작품이라 주장하는 이우환 화백도 있다. 이중섭·박수근 화백의 2800여점을 위조한 역대급 미술품 위작사건은 12년 만에 대법원 확정판결을 받았다.

그런데 이들 사건보다 강도가 센 실화가 여기 펼쳐졌으니. 50여년 미술시장에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한 인물이 털어놓은 고백성 ‘위조사건’에 댈 게 아니란 소리다. 책은 이탈리아계 미국인 켄 페레니(69)가 연출하고 주연까지 따낸 장구한 위조의 드라마다. 그래도 성이 안 찼는지, 그는 18∼19세기 세계 유명화가의 그림을 수없이 재창조하고 내다 판 지난 세월을 적나라하게 기록하며 작가로까지 나섰다.

최소한 말이다. 저자의 심각한 도덕성이 거슬리지 않는다면 그냥 책에 푹 빠져 감상할 필요가 있다. 위조의 기술, 위작을 대하는 미술시장의 자세, 미술품 딜러와 컬렉터·감정가의 허술한 듯 치밀한 커넥션이 이보다 더 정교하게 짜인 작품도 흔치 않다.

△‘위조기술’이라 쓰고 ‘예술’이라 읽어야 할…

이 과정은 잘 봐두는 게 좋다. ‘위작의 탄생’이란 거다. 위조를 부추기자는 게 아니다. 뭘 좀 알아야 덜 속을 테니. 저자가 일러준 강력한 팁은 ‘옛 그림을 위조하려면 옛 그림으로 시작하라’는 거다. 먼지가 절반인 골동품점을 문지방 닳도록 들락거리며 진짜 옛 그림을 찾아내라고 조언한다. 조건이 있다. 묵은 때를 충분히 뒤집어썼을 것, 별 가치가 없어 보일 것, 그래서 그 세월 동안 다들 외면했구나 할 만한 ‘작품’을 찾는 거다. 이런 요소가 미술품 딜러를 ‘환장하게’ 만든다고.

수집했으면 이제 본격적인 위조단계. ‘옛 그림’에서 ‘그림’을 지우고 ‘옛’만 남기는 작업이다. 물감접착력을 높이는 ‘젯소처리’를 한 캔버스에 새 그림을 그리고, 쩍쩍 갈라진 ‘크랙’을 만들고, 원작과 똑같은 피막효과인 ‘바니시’를 입히고. 그 가운데서도 ‘흠잡을 데 없는 흠’인 크랙을 만드는 일에 저자는 대단히 공을 들였다. 궁리 끝에 고안한 방법은 ‘분무’. 젯소에 토끼가죽 아교를 섞은 뒤 흩뿌리는 거다. 어설픈 붓질로 들킬 일을 원천봉쇄하고, 캔버스의 원래 무늬를 드러낼 수도 있다. 그러곤 햇볕 아래로 직행. 뻣뻣하고 파삭한 캔버스를 만든 뒤 고무공으로 툭툭 때리니 “완벽한 거미줄패턴의 크랙이 생겼다!”고.

옛 그림을 수리·복원하는 데 쓰는 ‘자외선 쏘이기’도 중요하다. 자외선은 그림 표면의 바니시가 얼마나 오래됐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단다. 위조한 서명도 잡아내고 덧칠한 물감이 새까맣게 보이기도 한다. 자외선램프 아래 옛 바니시가 보인다면 반박할 수 없는 진품이란 얘기다.



△3만달러로 시작해 71만 7500달러까지

저자가 유독 집중한 화가는 마틴 존슨 히드다. 습지나 바다 풍경, 열대조류나 난초 등을 그린 19세 미국작가. 히드를 파악하려 저자는 뉴욕·워싱턴의 미술관을 뒤져 벌새·난초·서명을 근접 촬영하고 연구에 몰입했다. 그러곤 그 일을 해낸다. 히드가 했던 대로 옛 캔버스를 구성하고 크랙을 만들고 바니시를 입히는 일까지. 찍히고 긁힌 낡은 액자는 서비스. 첫 거래는 3만달러(약 3200만원)에 성사됐다.

그러다가 FBI에 그의 그림이 갤러리를 열 만큼 쌓였다는 소문이 돌자 새가슴 신세는 면치 못한 듯하다. 다시는 위조 따윈 안 하리라 했단다. 그렇게 잠시 떠난 영국에서 새로운 정보를 접하는데. 크리스티의 ‘경매규정’이란 거다. 크게 두 가지. 경매회사나 판매자는 어떤 일이 있어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것, 가짜로 판명이 나더라도 구매자가 할 수 있는 일은 환불요청뿐이란 것. 저자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다시 비즈니스로 뛰어들라는 정중한 초대장”이었다고. 그렇게 저자는 영국 경매시장에서 ‘재기’한다. 우려했던 일은 멋쩍게 됐다고 털어놨다. “영국인의 전문분야에서 그들을 속일 수 있을까” 했던 걱정. 그림은 전문가에게도 가기도 전에 팔려나갔으니까.

극적인 사건 하나만 더 보태자. 그가 공들인 시리즈로 히드의 ‘브라질의 보배’가 있다. 그런데 런던 크리스티에 맡긴 그중 한 점이 ‘타임스’ 1면을 장식하는 역사를 쓴 거다. 미국인 관광객이 영국의 벼룩시장에서 ‘찾은’ 그림이 3만 4000파운드(약 5000만원)를 안겼다는 내용. 결국 이 그림은 뉴욕 크리스티 경매로 옮겨가 9만 6000달러(약 1억원)에 팔리게 된다. 이후로 히드의 위작 시리즈 중 최고가는 71만 7500달러(약 7억 7000만원)에 팔린 ‘팻 보이’. 소더비가 1994년에 판매했다.

저자 켄 페레니가 1994년 위조한 19세기 미국화가 마틴 존슨 히드의 시리즈 ‘브라질의 보배’ 중 ‘팻 보이’. 그해 소더비경매서 71만 7500달러(약 7억 7000만원)에 팔렸다(사진=라의눈).


△“미술시장에는 ‘구매자 위험 부담 원칙’ 작용”

암묵적으로 저자가 박아둔 주장은 원제가 압축한다. ‘카베아트 엠프토르’(Caveat Emptor). ‘구매자가 위험을 부담하는 원칙’이란 라틴어다. 위작의 위험을 위조자가 아닌 구매자가 짊어져야 한다는 압력이 행간에 들어 있다. 이 때문인지 저자는 컬렉터를 위한 친절한 조언도 잊지 않는다. “경매회사는 기만적인 기관이니 절대 믿지 말라”든가 “그들과 거래할 땐 반드시 서면으로 하라”든가. 자부심도 대단하다. 날고뛴다는 전문가들의 정밀검증을 통과했다는 것, 그것을 자격증 삼아 감동적인 판매로 연결했다는 것. 어찌 보면 저자의 타깃은 과학수사 혹은 감정가였을지 모르겠다. 붓 감각의 만족보다 두뇌싸움의 희열이 더 강렬해 보이니.

설마 저자의 그림이 집에 걸려 있지 않다면 책은 퍽 ‘재미있다’. 기본적으로 범죄드라마인 데다 돈이 얽혀 있지 않나. 게다가 교양의 총결산이라 할 미술이야기다. 고급정보란 소리다. 하나 더. 책을 번역한 이동천 박사. ‘국내 유일한 미술품 감정학자’로 소개할 그가 저자와 형성한 보이지 않는 기류는 긴장감을 끌어올린다.

위작? 위조? 끝은 없다. 만약 오늘을 넘겼다면 잠시 숨고르기일 뿐 언제든 다시 튀어나올 판이다. 믿고 사는 미술품? 그런 것도 있을 리 없다. 위조자는 진품처럼 보이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컬렉터는 진품처럼 보이는 작품에 속지 않기 위해 상상 이상의 발품을 팔아댈 뿐이다. 백조처럼 우아한 예술? 천만에. 백조처럼 과격한 발차기! 그게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