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없는 금융정책]해묵은 금융적폐 매달리다 4차산업 대응적기 놓칠라(종합)
by송길호 기자
2018.03.01 05:35:00
핀테크 규제개혁,성장동력 확충 급한데...
차명계좌 등 과거회귀형 정책에 역량소모
미래지향적 이슈에 정책역량 집중해야
[이데일리 송길호 금융전문기자] 요즘 금융위원회 내에서 가장 뜨거운 부서는 금융정책국 은행과다. 작년 10월 국정감사 이후 불거진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차명계좌 문제를 다루는 주무부서다. 국회에서 언론에서 부처내에서도 논란이 불거지니 모두 정신이 없다. 금융위의 한 관료는“ 그동안 은행과의 주요 업무는 BIS비율관리 등 건전성관리나 은행 영업행태에 대한 점검 등 루틴한 업무가 많았다”며 “하지만 작년 국감 이후 가장 주목 받는 부서가 됐다”고 말했다.
이건희 회장의 차명계좌 과세 문제는 적폐청산의 미명아래 진행되는 금융위의 대표적인 과거 회귀형 정책이다. 금융감독원도 크게 다를 바 없다. 작년말부터 불거진 은행권 특혜채용 논란 이후 채용비리 점검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며 금융권과 꼴 사나운 진실공방을 벌이고 있다.
금융당국의 전직 고위관료는 “금융산업을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독자적인 산업으로 키우겠다는 논의는 아예 사라졌다”며 “ 지금은 적폐청산에 몰두하는 정권에 보조를 맞추려는 듯 과거로만 눈길을 돌리는 것 같다”고 일침을 놓았다.
문재인정부 금융정책이 표류하고 있다. 금융산업을 어떻게 키울지, 그래서 국민경제에 어떤 부가적인 혜택을 제공할지에 대한 기본적인 계획도 정책도 보이지 않는다. 진흥·조장·개혁 등의 화두는 사라진 채 보호·연명·지원이라는 단기 미봉차원의 즉흥적 대응만이 난무할 뿐이다.
이는 현 정부들어 금융산업이 실물부문을 지원하는 후선산업, 부차적인 과제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정권초부터 논란이 된 금융홀대론이 여전히 팽배한 채 금융산업의 운신 폭도 점차 좁아지고 있는 모습이다.
금융권 관계자는 “노무현정부의 금융허브, 이명박정부와 박근혜정부의 녹색금융·창조금융 등 이전 정부에선 그래도 금융산업의 미래에 대한 비전이나 구체적인 실행방안에 대한 고민은 있었다.”며 “지금은 금융정책에 대한 기본적인 로드맵조차 없다”고 말했다.
이미 금융권 성과연봉제 도입, 인터넷전문은행의 자본확충 등 금융산업의 파이를 키우기 위한 정책들은 폐지되거나 은산분리 규제로 제동이 걸린 상태다. 반면 신용카드 가맹점 수수료 인하, 은행 가산금리 규제 등 가격정책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은 결과적으로 금융권의 발목을 잡고 있다.
4차 산업혁명에 따른 금융생태계의 변화, 그에 따른 장기적 비전 없이 문제가 불거지면 미봉책에 급급한 모습이 반복되면서 금융정책에 대한 신뢰는 약화되고 있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경영학부 교수는 “금융권의 적폐청산 문제와 연결되면서 금융당국이 과거 헤묵은 이슈들에 너무 매달리고 있다”며 “금융생태계의 변화에 대응한 각종 규제완화나 블록체인 기술 진흥 등 미래지향적 이슈에 정책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7월 문재인정부가 발표한 100대 국정과제를 처음 접한 A 교수는 깜짝 놀랐다. 기본적인 경제운용계획에 금융정책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급기야 청와대에 직접 문제제기를 한 결과 돌아온 답은 그를 더욱 당혹스럽게 했다. 인정은 하면서도 별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이었다는 거다. 그는 “(청와대에) 금융을 아는 브레인이 없어 금융정책의 심각성을 모르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문재인정부의 표류하는 금융정책는 정권초부터 예견된 사실이다. 금융홀대론이 팽배한 현실에서 금융산업 육성에 대한 명확한 비전이 없으니 그때그때 밀려드는 현안 처리에 급급하다는 얘기다.
현 정부들어 금융산업의 파이를 키우기 위한 정책들은 전격적으로 폐지되거나 헤묵은 규제로 제동이 걸린 상태다.
단적인 예는 성과연봉제 폐지. 금융권의 성과연봉제 도입은 임종룡 금융위원장 시절 금융을 독자산업으로 키우기 위한 기본적인 정책수단으로 야심차게 밀어붙였던 정책이다. 하지만 현 정부들어 노동계의 강력 반발로 물거품이 됐다. 일부 금융공기업 노조는 기존 합의를 아예 뒤엎으며 오히려 역공을 펼쳤다.
기존 은행권의 ‘메기역할’을 모토로 선을 보인 인터넷전문은행은 제도화과정에서 여전히 난항을 겪고 있다. 자본확충의 필요성이 절실하지만 기존 은행에 적용됐던 은산분리의 규제에 발목이 잡혀 옴짝달싹 못하고 있는 형국이다. 인터넷전문은행에 한해 산업자본이 최대 50%까지 지분을 늘릴 수 있도록 완화한 특별법 개정안은 여전히 서류철속에 잠들어 있다.
반면 금융권의 금리나 수수료 등 가격정책에 대해선 적극적인 개입이 이뤄지고 있다. 금융계 관계자는 “신용카드 가맹점 수수료 인하, 은행 가산금리 규제 등 각종 규제책은 이전 정부보다 도가 심해진 것 같다”며 “결과적으로 금융권의 자율성을 저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금융위원회 내 금융행정혁신위원회는 적폐청산위원회와 다를 바 없이 운용되고 있다. 혁신위가 최근 제시한 최종 권고안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차명계좌 과세, 케이뱅크 인가과정 적절성 여부, 키코사태의 금융감독 문제 등 과거회귀형 행태를 정조준했다. 윤창현 교수는 “금융 이슈가 은산분리같은 형식논리나 지엽적인 문제에 얽매여 있다.”며 “대법원판결까지 끝난 키코문제까지 언급하는 건 지나친 처사”라고 지적했다.
| 윤석헌 금융행정혁신위원장이 지난해 12월 20일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 브리핑룸에서 혁신위회 최종 권고안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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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정책의 방향성이 모호하니 정책딜레머가 나타난다. 최저임금인상, 근로시간단축,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등 소득주도성장의 이름으로 진행되는 각종 정책들과 결이 다른 정책들이 공존하면서 금융권이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은행권의 자체 구조조정부터 난관에 직면해 있다. 현 정부가 일자리 창출을 제1의 정책과제로 제시하면서 생산성 제고를 위한 은행산업의 다이어트는 제약을 받고 있는 상태. 금융계 관계자는 “인터넷뱅킹이 일반화되면서 점포축소는 불가피하지만 현 정부 정책기조에 따라 인력재편 등 구조조정이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말했다.
기업 구조조정도 답보상태다. 금융정책의 비전이 없으니 구체적인 정책수단을 어떻게 구사할지 모호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구조조정과정에서 국책은행이 역할을 할지 민간주도에 맡길지 등에 대한 명확한 방향설정이 없는 상태”라고 말했다.
중견 조선사들에 대한 지지부진한 구조조정, 산업은행 산하 구조조정 대상 기업의 부실채권 문제 등에 선제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것도 결국 이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작년 연말과 연초 뜨겁게 달궜던 가상화폐(암호화폐)규제에 대한 당국의 오락가락 행보도 이 같은 맥락이다. 미래금융에 대한 비전이 없는 상태에서 눈에 보이는 버블 잡겠다며 즉흥적인 대응에 급급하니 여론에 따라 정책이 냉탕과 온탕을 반복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 같은 현상은 결국 청와대의 정책독주의 결과라는 지적이 나온다.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금융정책도 적폐청산이 최우선과제가 되면서 과거회귀형 정책이 난무하고 있기 때문이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박근혜정부시절 금융개혁의 일환으로 도입된 성과연봉제나 인터넷전문은행 설립은 주홍글씨가 붙은 정책”이라며 “적극적으로 추진하는데 부담을 느낀다”고 토로했다.
이는 금융당국의 보신주의와도 연결된다. 금융계 관계자는 “금융당국 스스로 구조조정 문제 등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문제에 대해 손에 피묻힐 일을 하려 하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금융산업의 경쟁력은 계속 답보상태에 머물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국내 총생산(GDP)에서 금융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80년대 들어 3∼4%에서 90년대 이후 5∼6%로 상승했지만 2000년대 이후 여전히 정체상태다.
사실 역대 정부의 금융정책은 방법론은 달랐고 성과도 미흡했지만 그래도 금융산업 발전에 대한 고민의 흔적은 보였다.
노무현정부 시절 금융은 신성장산업이었다. 대한민국을 동북아시아의 금융허브로 만들겠다는 야심찬 청사진은 다소 논란은 있었지만 정책의 푯대가 됐다. 자본시장통합법 제정을 통해 금융권역 간 칸막이를 낮추고 각종 규제완화에 나선 건 이 같은 정책기조와 맥을 같이한다.
이명박정부 시절 대형은행 육성은 금융산업에 대한 진흥전략이었다. 메가뱅크론으로 불린 이 전략은 국제적인 대형은행 육성을 통해 기업투자활동을 지원하고 금융산업 자체의 발전을 이끈다는 포석이었다. 박근혜정부 시절엔 노동 공공 교육 부문과 함께 금융부문을 4대 개혁의 대상으로 삼았다. ‘거친개혁’으로 상징되는 금융개혁을 통해 금융산업을 성장산업으로 육성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대비한 핀테크 육성, 그에 따른 인터넷전문은행의 출현은 금융산업의 파이를 키우기 위한 대표적인 정책이다.
전문가들은 금융산업을 실물부문 지원을 위한 부차적인 산업으로 보는 단편적 시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인실 서강대 경제대학원 교수는 “경제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는 이 때, 미래에 대한 혜안을 갖고 의사결정을 해야 할 타이밍”이라며 “금융을 실물부문을 뒷받침하는 보조수단이 아닌 고급 부가가치서비스산업으로 키우기 위한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금융생태계의 변화에 대응한 청사진이 없다”며 “금융정책이 지향하는 바를 분명히 하고 정책목표에 따라 달성할 수 있는 어젠더를 제시해 구체적인 정책과제를 도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