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상임금 법제화 험로 예고… 노동계 “신의칙 배제” Vs 경영계 “노사자율 결정”

by박태진 기자
2017.09.04 05:00:00

노동계 "고정성 있는 임금은 모두 통상임금으로 인정해야"
경영계 "월급여만 통상임금으로, 노사자율 결정 인정해야"
전문가 “임금체계 단순화 목적..간편·명료하게 규정해야”

지난달 31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기아자동차 통상임금’과 관련한 1심 선고공판을 마친 뒤, 기아자동차 노조원들이 박수를 치며 자축하고 있다.(사진=방인권 기자)
[이데일리 박태진 기자] 기아자동차 노조 소송 등 통상임금을 둘러싸고 노사 간 분쟁이 끊이지 않자 정부가 결국 법제화를 추진하기로 했다. 법으로 통상임금 기준을 명확히 정해 노사간 분란의 소지를 차단하겠다는 것이다.

노동계와 경영계는 통상임금 기준을 법으로 정해 명확히 하자는 데는 공감하면서도 기준에 관해서는 뚜렷한 시각차를 보이고 있다. 노동계는 법원판례를 반영해 고정적으로 지급하는 임금 전부를, 경영계는 반기·분기에 지급하는 상여금 등을 제외하고 월정액으로 지급하는 금전만 통상임금으로 규정해야 한다고 맞서고 있다.

‘신의성실의 원칙’(신의칙)에 대해서도 입장이 엇갈린다. 노동계는 ‘신의칙’은 임금채권의 법적인 효력을 제한하는 만큼 법제화 때는 배제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반면 경영계는 노사간 사전합의를 통해 통상임금의 범위를 정할 경우 이를 인정해야 한다고 맞서고 있다.

대법원은 2013년 12월 전원합의체 판결을 통해 통상임금의 범위가 넓어져 회사가 중대한 경영상의 어려움에 직면하는 상황, 회사의 존립이 위협받는 상황이 우려된다면 문제가 된 임금을 통상임금에서 빼기로 하는 노사간의 합의나 관례를 인정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우선 노동계는 법원 판례를 기준으로 법제화를 추진하되 고정성이 있는 임금은 모두 통상임금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고정성 임금은 근로자가 제공한 근로에 대해 성과 등 다른 조건없이 사전에 지급을 약속한 임금을 말한다.

민주노총 관계자는 “정기성·일률성·고정성을 바탕으로 한 대법원의 통상임금 법리를 기준으로 법제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통상임금 분쟁은 그간 법원이 신의성실의 원칙(신의칙)을 적용하면서 스스로 혼란을 자초한 셈이다. 이는 채무가 있는 데도 갚지 않아도 된다는 논리와 같기 때문에 앞으로 만들어질 법령에서는 이 부분(신의칙)을 빼야한다”고 주장했다.

노동계는 통상임금 대법원 판결 직후 고용부가 내놓은 ‘통상임금 노사지도 지침’도 수정·보완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한국노총 관계자는 “이번 기아차 법원 판결의 취지를 살려서 통상임금은 정당한 노동의 대가로 받는 돈이라는 기본 원칙을 세울 필요가 있다”며 “정기성을 갖춘 상여금도 고정성이 없는 경우(특정 시점에만 재직한 근로자에 한정) 통상임금이 아니라고 규정한 고용노동부의 ‘통상임금 노사지도 지침’도 개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경영계는 매월 지급하는 임금만 통상임금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현재는 격월이나 분기별로 지급하는 상여금도 정기적으로 지급하는 경우에는 통상임금에 포함된다. 기업 성과에 따라 분기나 반기에 지급하는 상여금까지 통상임금에 포함하면서 기업의 인건비 부담이 과도하게 커진 만큼 정기성을 임금체계에 기반한 월급으로만 명시하자는 입장이다.

재계 관계자는 “임금체계는 매달 지급하는 월급여를 기준으로 하는게 일반적인 상식”이라며 “정기적으로 지급한다는 이유로 1년에 한번 지급하는 상여금을 통상임금으로 보는 것은 과도한 만큼 매달 지급하는 금전을 기준으로 통상임금 범위를 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통상임금 개념부터 새롭게 규정하고 노사 자율 조항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한국경영자총협회 관계자는 “통상임금은 연장근로 가산임금 등 법정수당 계산을 위한 도구적 개념으로 봐야 한다”면서 “그 기능과 존재 목적을 고려할 때 명확하고 단순하게 규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통상임금 범위와 관련해 기업 상황에 맞게 노사 자율로 해법을 만들 수 있는 여지를 법제화해야 한다. 특히 ‘노사가 통상임금에서 제외할 것을 합의한 금품’은 통상임금 범위에서 제외하는 조항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복잡한 현행 임금체계를 단순화하는 정책적 고려까지 염두에 두고 통상임금을 규정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권혁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통상임금은 가산임금의 기준이 되는 만큼 명확성을 확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며 “임금을 명확한 기준에 근거해 산정하려는 목적이 법에 명시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태기 단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현재 임금체계가 너무 복잡해서 모든 근로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단순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통상임금의 산정이 단순·간편해지면 임금체계의 단순화를 이끌어 낼 수 있다”고 지적했다.

대법원 판례를 준용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도 있다. 새로운 기준을 정하려면 조율 과정에서 갈등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는 이유에서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통상임금은 대법원 판례대로 법제화를 해야 사회적 갈등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노사가 자율적으로 합의한 임금 결정에 대해선 법적 효력을 인정하는 근거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권 교수는 “독일, 영국 등에서는 노사 간 합의로 결정된 임금에 대해서는 존중해준다”면서 “우리나라는 아직 이런 부분이 법제화되어 있지 않지만 노사 간 분쟁 예방을 위해선 해외사례를 적극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