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조선일보 기자
2003.12.25 10:31:49
"법조인 돼도 딱한 사람 사정 잘 이해"
[조선일보 제공] 1996년 1월 30일 오전 대구의 한 아파트 건설현장으로 걸려온 한 통의 전화는 삽시간에 현장을 환호성으로 뒤덮었다. 공사판의 인부들은 살을 에는 겨울 바람이 무색하도록 활짝 웃으며 같이 일하던 한 젊은이에게 축하인사를 건넸다. 장승수, 25세. 막노동판 일꾼이었던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6년만에 서울대 인문계 및 법대 전체수석의 영광을 안았다.
20003년 12월 23일 장승수(32)씨는 제 45회 사법시험 최종합격을 통보받았다. 크리스마스 이브인 다음날, 아들의 합격소식을 듣고 서울행 기차를 탄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던 그는 합격소감을 묻는 기자에게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떨어지면 또 다시 힘겨운 수험생활 해야 하는데 그것 안 해도 되고. 가장인 제가 수험공부에만 매달려 있으면서 어머니께 걱정 끼쳐드리는 게 큰 부담이었는데 그 부담도 덜었으니까요.”
그는 “기분이 좋다”고 했으나 “서울대 수석합격을 통보받았을 때와 같은 환희와 희열을 내 인생에서 다시 맛보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당시 기분은 말로는 표현 못하지요. 6년간 갖은 고생해서 얻은 건데요.” 10살 때 아버지를 여읜 그는 지난 1990년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자마자 식당 물수건 배달, 가스통 배달, 택시운전, 공사장 막노동일 등을 하면서 생계를 꾸리고 대입을 준비했다.
대학에 입학한 해 8월 그는 자신의 수험기를 책으로 펴냈다. 책은 순식간에 베스트셀러가 됐고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라는 책 제목은 인구에 회자됐다. 그는 “그 책의 인세 덕분에 대학시절 내내 생계 걱정 없이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며 “그 책을 읽은 전국의 독자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꼭 써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과연 “공부가 가장 쉽다”고 생각했을까. 그는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겠냐”고 말했다. “공부가 어렵지 어떻게 쉽겠습니까. 오랜 시간동안 해야만 하는 일인데요. 기본기를 갖추는데도 최소 2~3년은 걸리는데다가 남들이 만든 이론을 완전히 이해해 내 것으로 만든 후 그에 대한 내 생각까지 끌어내 정리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요.”
그러나 그는 “공부는 내가 25살이 될 때까지 해본 것 중 가장 재미있었던 것”이라고 했다. “공부를 하고 있는 나 자신을 가만히 바라볼 때면 기쁨이 느껴지곤 해요 책을 뒤적이다가 몰랐던 것을 깨달았을 때 느끼는 기쁨이 저는 그 어떤 것보다 좋았어요.”
그는 “대학 1~2학년 때는 다른 법대생들처럼 고시학원에 다니며 고시공부를 하기보다는 학교 공부에 전념했다”고 했다. 집 근처 체육관에 다니며 권투도 시작했다. 지난 2000년 프로복싱 수퍼플라이급 테스트를 통과하기도 한 그는 내년 1월 중순에 있을 신인왕전 출전 여부를 놓고 고민중이라고 했다. 대회 일정과 사법연수원 일정이 겹치기 때문이란다.
그는 “권투는 내게 어릴 적 꿈과 같은 것”이라며 웃었다. “중학교 때부터 권투를 좋아했었는데 집안 형편때문에 기회가 없었어요. 권투는 극도로 격렬한 스포츠죠. 링에서 스파링할 경우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숨이 차 와요. 그런 극한적 상황에서도 맞지 않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해요. 인생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힘든 상황일수록 자신을 놓으면 안 된다는 것, 그런 걸 배워요”
그는 지난 1999년부터 본격적으로 사법시험 준비를 시작했다고 했다. 오전 9시에 학교 도서관에 자리를 잡으면 도서관 문을 닫는 밤 11시까지 제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도서관에서 집까지의 2㎞ 넘는 거리를 매일 밤 달렸다고 했다. 그는 “계속 팽팽하게 이어지던 긴장이 풀렸던1997년 가을 폐결핵 및 결핵성 늑막염 진단을 받고 1년간 휴학을 해야만 했다”며 “체력의 중요성을 그 때 깨달았다”고 했다.
7년 전 겨울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했었던 그는 세월이 지나면서 차츰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졌다. 그리고 이제 다시 대중의 관심 속으로 들어왔다. 그는 “당시 쏟아지는 관심이 많이 부담스러웠어요. 사람이니까요.” 했다. “내게로 향하는 눈길들이 버거웠어요. 어떤 사람들은 내게 우호적인 눈길을 보냈지만 또 다른 이들의 시선은 비우호적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죠. 별 것도 아닌 것이 잘난 척 한다는 시선, 그렇지만 지금은 모두 다 떨쳐버릴 수 있어요. 세월이 많이 지났으니까요. 내게 우호적인 이들에게는 고마워하고 비우호적인 사람들에게는 미안하게 생각해요. 어쨌든 내 행동이 그들에게 불쾌감을 주었으니까요.”
그는 “내게 붙은 ‘서울법대 꼬리표’도, 이제 덧붙여진 ‘사시합격’이라는 또 하나의 꼬리표도 과감히 떨쳐버릴 수 있을 것 같다”며 “떨쳐버린다는 건 예를 들자면 법조인의 길이 내게 맞지 않을 경우 그걸 버리고 건설 현장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뜻”이라고 했다. 그는 “나는 건설 현장 일 참 좋아해요” 하면서 미소를 지었다. “참 보람 있는 일이거든요.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집을 만들고, 휴일에 가족들과 연인들이 함께 거닐 수 있는 공원을 만들고 하는 일이잖아요.”
그는 “연수원 생활이 시작되면 공부에만 매진할 것”이라며 “앞으로의 진로를 아직 결정하지는 못했다”고 했다. “판·검사나 변호사가 될지, 아니면 계속 공부해서 학자가 될지는 심사숙고해서 결정할 겁니다. 제가 서울 법대에 진학한 건 학비가 싸다는 것과 과외 아르바이트시 보수가 많다는 것 등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에서였을뿐, 학과 선택 당시 사법고시 생각은 머리 속에 없었어요.”
그는 “내 스무살에는 희망이라곤 없었다”고 했다. “집안 형편때문에 대학 진학은 꿈에도 못 꿨어요. 고등학교 졸업후 7개월간 물수건 배달 일을 했었죠. 오전 8시부터 오후 7시까지 한 달에 딱 이틀 쉬고 30만원 월급 받으며 일했죠. 매일 매일 오토바이로 150㎞를 달렸어요. 위험하고, 힘들고, 지저분한 그런 일이에요. 1990년 당시 가난하고 못 배운 보통의 스무살짜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수준이었어요. 이러다가는 어릴 때 그랬던 것처럼 지독하게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겠구나 싶더라구요. 대학 진학을 생각한 것도 암울한 현실을 돌파할 수 있는 활로가 필요했기 때문이었어요.”
그러나 그는 “가난은 내게 극복할 대상일 뿐 가난때문에 한(恨)이 맺히거나 하늘을 원망한 적은 없었다”고 했다. “돈이란 몸을 움직여 벌면 되는 거니까요. 오히려 몸소 가난을 겪었고 주변에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기때문에 법조인이 되더라도 딱한 사람들 사정을 잘 이해해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