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김민구 기자
2015.09.25 03:01:01
서양식 카드놀이 트럼프에 ‘상대방 카드를 전부 빼앗아 온다’ (Beggar-my-neighbor)는 용어가 있다. 게임에서 상대방 카드를 모두 가져간다면 승패는 물어보나 마나다. 이를 경제학에 접목하면 자국 경제를 살리기 위해 다른 나라 경제를 희생시키는 상황이 빚어질 것이다. 이같은 경제현상을 영국 경제학자 J. V. 로빈슨은 ‘근린궁핍화정책’(近隣窮乏化政策)이라고 불렀다. 이웃을 거지로 만든다는 얘기다. 근린궁핍화정책을 자세히 알기 위해 타임머신을 타고 30년전 이맘때로 되돌아가보자.
1985년 9월 22일 미국 뉴욕시에 있는 플라자호텔. 이곳에는 미국, 일본, 서독, 프랑스, 영국 등 선진 5개국(G5) 경제수장이 한 자리에 모여 앉았다. 이날 회의장에는 긴장감과 비장함이 교차됐다. G5 경제수장들은 회의를 시작한 지 20분만에 서둘러 끝냈지만 이날 모임은 세계 경제질서를 뒤흔든 역사적 사건이었다. 달러를 제외한 주요 통화가치를 올리는 내용을 담은 ‘플라자 합의’가 발표됐기 때문이다.
플라자합의의 표면적 명분은 세계경제의 불균형 해소였다. 그러나 속내는 무역적자와 재정적자라는 ‘쌍둥이 적자’로 골머리를 앓아온 미국이 대미(對美)수출로 짭짤하게 재미를 본 일본과 독일에게 엔화와 마르크화 가치를 높여(환율은 하락) 수출규모를 줄이라는 압력을 주기 위한 장(場)이었다.
미국의 우방국 ‘손목 비틀기’는 효험을 발휘했다. 플라자합의 직전 달러당 240~250엔대였던 엔·달러 환율은 1985년 말 200엔, 1988년에는 120엔대까지 급락해 3년 만에 반토막이 됐다. 이에 따라 일본제품 가격이 세계무대에서 두 배로 껑충 뛰어올랐다. 일본이 ‘잃어버린 20년’에 빠지게 된 데에는 부동산 버블 등 여러 요인이 있지만 플라자합의가 위기의 단초라는 점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역사적으로 경상수지 적자에 시달리는 국가들은 자국 통화절하를 유도해 이를 돌파하는 근린궁핍화정책 카드를 사용해왔다. 자국 통화가치 절하가 ‘수입 감소ㆍ수출 증대→무역수지 흑자→설비투자 활성화→고용 창출→경기부양’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근대 경제사를 살펴보면 이러한 공식이 항상 성립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한 국가의 대외경쟁력은 플라자합의와 같은 인위적인 환율 조정이 아니라 창의성과 혁신이라는 창조경제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1980년 당시 자동차와 반도체 등 주력산업에서 일본에 주도권을 빼앗긴 미국이 플라자합의로 일본을 압박했지만 기대했던 대일 무역역조가 해결되지 않은 게 대표적인 예다.
오히려 일본기업은 환율 반토막에도 불구하고 생산성 향상과 기술혁신을 통해 반도체와 컴퓨터 등 첨단제품을 개발하고 세계시장에서 ‘메이드 인 재팬’ 브랜드 파워를 높여 환율에 대한 내성을 키웠다. 플라자합의의 또다른 희생자인 독일도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갖춘 제품으로 미국과의 무역전쟁에서 승전고를 울리지 않았던가.
우리나라 정부와 기업이 10여년 이상 되풀이해온 낡은 레코드판인 환율타령도 재점검해야 한다. 수출에 의존하는 천수답경제인 우리로서는 환율이 매우 중요한 요소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일본이 엔·달러 환율이 반토막나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기업체질 강화와 기술혁신으로 엔고(高)의 파고를 넘긴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도 고(高)환율 정책이라는 모르핀 주사에만 의존하지 말고 세계 초일류상품 개발로 환율전쟁에서 이겨야 한다.
환율 하락으로 수출에 치명타를 입었다는 식상한 레퍼토리에 세계 어느 나라도 우리 입장을 이해하지 않는다. 결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과 창의력을 갖추는 수밖에 없다. 플라자합의 30주년을 맞아 우리가 가슴 깊이 새겨야 할 교훈은 바로 이것이다.
<글로벌마켓부장·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