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봄이 질 무렵, 야생의 봄이 피어나다…무주 적상산

by강경록 기자
2014.05.27 06:24:23

적상산 피나물 군락지. 일명 노랑매미꽃으로 불린다. 노란색 꽃받침은 윤기가 흐르고, 꽃잎이 밝고 화사하다. 원래 4~5월에 개화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나무가 우거지고 습기가 많은 곳을 좋아해 이맘 때면 적상산 깊은 산길에서 만날 수 있다.


[이데일리 강경록 기자] “천지간에 꽃입니다./ 눈가고 마음 가도 발길 닿은 곳마다 꽃입니다./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지금 꽃이 피고 못 견디겠어요.” 집을 나서는 길에 시인 김용택의 시 구절 하나를 마음에 담았다. 전북 무주의 적상산 정상에 피나물(노랑매미꽃)이 마지막 봄꽃 향연을 펼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여인네의 붉은 치마를 닮았다 하여 이름도 ‘붉을 적(赤)’에 ‘치마 상(裳)’이다. 인근 덕유산의 유명세에 가려져 그리 알려져 있지 않지만 제법 숨겨진 비경이 많은 곳이다. 숲길을 걷다가도 갑작스레 주변이 환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어 보면 샛노란 피나물 군락이 끝없이 이어진다. 정상까지 가는 길은 비교적 편하다. 도로폭이 좁은 ‘산림도로’(임도)가 아니라서다. 구절양장의 길이지만 널찍하고 쾌적한 데다 도로 옆도 잘 정비가 돼 있어 운전하기 쉽다. 안국사에 차를 세우고 뒤편 정상으로 향하는 길. 그 길의 중간쯤, 5월 끝자락에 핀 마지막 피나물 군락지가 있다. 이번주가 지나면 그 꽃잎들이 모두 질지도 모르니 서두르는 게 좋을 거다.

적상산 산성 아래 위치한 ‘장군바위’. 절벽 아래에 서 있는 모습이 마치 고려시대의 충신이었던 최영 장군의 모습을 닮았다.


◇적상산 정상서 만난 비밀의 화원 ‘피나물 군락지’

안국사에서 향로봉까지 이르는 숲길. 이즈음 산책로로 손색이 없다. 왕복해서 약 4.5㎞ 남짓한 거리다. 출발지는 안국사 해우소. 샛길로 난 부드러운 길을 따라 산책하듯 20여분 걸으면 안렴대다. 적상산에서 가장 빼어난 전망을 자랑하는 곳이다. 적상산 남쪽 층암절벽 위에 위치한 안렴대는 사방이 낭떠러지로 이루어져 있다. 남쪽 조망이 좋고 낙조도 일품이라 안렴대가 실질적인 적상산의 정상 역할을 한다. 치마를 두른 듯한 적상산 산허리 절벽의 남쪽 꼭대기에 해당하는 곳이다. 청명한 날이면 멀리 지리산 줄기와 말의 귀를 닮은 진안 마이산의 두 봉우리도 또렷이 보인다. 안렴대라는 이름은 고려시대 거란이 침입했을 때 삼도(三道) 안렴사(按廉使)가 군사들을 이끌고 이곳으로 들어와 진을 치고 난을 피했다는 데서 비롯됐단다. 병자호란 때는 실록 ‘적상산사고’를 이 바위 밑에 있는 석실로 옮겨 난을 피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안렴대에서 향로봉까지는 약 2㎞. 향로봉까지는 좁지만 그리 힘들지 않다. 안렴대에 서서 산책하듯 20여분 걸으면 피나물 군락지에 닿는다. 길섶과 숲 속, 언덕배기에 노랑매미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화사한 꽃길을 이루고 있다. 특히 초록의 잎새 위 활짝 핀 노랑매미꽃에 봄 햇살이라도 내려앉으면 꼬마전구를 켜놓은 듯 영롱하고도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일명 ‘피나물’이라고도 불리는 노랑매미꽃은 양귀비과에 속한다. 노란색 꽃받침은 윤기가 흐르고 꽃잎이 밝고 화사하다. 나무가 우거지고 습기가 많은 곳을 좋아해 깊은 산길에서 만날 수 있다. 대부분의 봄꽃이 키가 작은 데 비해 노랑매미꽃은 30㎝ 정도로 훌쩍 자라며 큰 군락을 이뤄 마치 산중 화원을 연상케 한다. 어린 순은 삶아서 나물로도 먹지만 독이 있어 물에 한참 우려내야 한다. 한방에서는 하청화근(荷靑花根)이라고 해 그 뿌리를 관절염·신경통·타박상 등의 약용으로 쓴다.

들녘의 봄꽃들은 이미 시든 지 오래. 하지만 적상산 산마루는 그 자리를 비집고 나선 고운 야생화가 접수하고 있다. 이 산중의 봄은 이제 막 시작되는 듯싶다. 고산지대를 화사하게 수놓은 들꽃들은 산 아래의 봄꽃과는 느낌부터가 다르다. 마치 영산의 기운을 받기라도 한 듯 햇살이 내려앉은 자태가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정상산은 능선 중턱부터 눈길이 닿는 산 하단부까지 죄다 피나물 일색이다. 간간이 보랏빛 벌깨덩굴 등의 들꽃들도 눈에 띄었지만 노란꽃의 기세는 그야말로 산자락을 압도하고 있었다.

적상산 정상의 피나물 군락지. 일명 노랑매미꽃으로 불린다. 노란색 꽃받침은 윤기가 흐르고 꽃잎이 밝고 화사하다. 나무가 우거지고 습기가 많은 곳을 좋아해 적상산 깊은 산길에서 만날 수 있다.




△붉은 치마 차려입은 산의 유혹

산정호수를 만들면서 적상산 정상까지 도로를 냈다. 덕분에 적상산에 오르는 길에 꼭 들러야 할 두 군데가 생겼다. 머루와인 저장고와 천일폭포다. 저장고는 상부댐 설치를 위해 뚫었던 600여m 길이의 터널 중 250m 공간을 와인저장고로 탈바꿈시킨 공간. 50m만 걸어 들어가도 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서늘하다. 천일폭포는 하늘 아래 하나만 있다고 해서 ‘천일(天一)’이라는 이름이 붙은 폭포. 15m가 넘는 절벽의 갈라진 틈 사이에서 쏟아지는 물줄기는 장쾌하면서도 시원하다.

적상산을 오르는 길은 크게 세 갈래다. 등산을 즐기는 산악인들은 안시내에서 출발해 학송대~안렴대~송신중계탑을 거쳐 정상에 오르거나 서창마을에서 장도바위를 거쳐 정상으로 이어지는 길을 선택한다. 2시간가량 걸린다. 그러나 일반인들은 차편으로 포장도로가 개설된 산정호수까지 도착해 안국사~송신중계탑~정상에 이르는 길을 좋아한다. 등산이라기보다 30분 정도 송림과 단풍나무 숲을 즐기는 산책이라는 표현이 적당하다. 차량을 이용해 굽이굽이 산을 돌아 오르는 길은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다.

산중에는 고려말 최영장군이 군사를 훈련시켰다는 적상산성을 비롯해 안국사와 조선시대에 승병을 양성하던 호국사 등의 사찰이 있다. 안국사는 고려 충렬왕 3년(1277년) 월인화상이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적상산 양수발전소가 건설되면서 호국사지 위치로 옮겨져 복원됐다. 세계 각국의 불상 등을 수집·보관하는 성보박물관은 독보적이다. 중요문화재 제1267호인 영산회상괘불과 유형문화재 제42호인 극락전, 제85호 호국사비 등이 있다.

안국사 쪽으로 올라가기 전에 보이는 산정호수(해발 800m)도 볼 만하다. 양수발전소를 지으면서 생긴 인공호수다. 적상산 사고지는 광해군 때 지은 곳. 임진왜란 때 정족산과 태백산 등지에 흩어져 있던 전국의 4대 사고지가 모두 불에 타버리는 등 화를 입자 광해군 때 전란을 피할 수 있는 천혜의 요새를 찾던 중 이곳을 적지로 꼽았단다. 다섯 번째로 만들어진 이 사고지로 묘향산에 보관 중이던 실록 등을 옮겼다고 한다.

안국사 주변 안렴대에서 바라본 백두대간. 안렴대는 고려 말 거란 침입 때 안렴사(지방 장관)가 진을 치고 피란했다는 바위 절벽으로, 적상산 최고의 전망대로 꼽히는 곳이다
◇여행메모

△가는길=수도권에서 승용차로 갈 경우 통영대전고속도로 무주나들목으로 국도 19호선을 타고 읍내 쪽으로 가다가 727번 지방도로 갈아타고 가면 적상산이다.

△먹거리= 큰손식당(063-322-3605)의 ‘빙어 도리뱅뱅’과 ‘어죽’,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깨끗한 음식점’인 천지가든(063-322-3456)의 버섯전골과 산채비빔밥은 무주에서만 즐길 수 있는 별미다. 어죽은 청정수역에서 잡은 민물 가자미를 푹 삶아 뼈를 발라낸 뒤 찹쌀과 고추장·수제비·파·마늘·깨 등 무주 로컬푸드를 넣어 만든 고단백 보양식이다.

△볼거리=무주에서 가장 대표적인 볼거리는 덕유산. 그중 구천동 계곡은 일부러라도 들러봄 직한 곳이다. 무주 구천동 제1경인 라제통문을 시작으로 제4경인 와룡담, 제6경인 일사대는 덕유산 국립공원 밖에 있어 찾아가기 편하다. 이외에도 무주읍 전통공예문화촌 입구에 있는 한풍루도 추천코스. 여유가 있다면 김환태 문학관과 무주곤충박물관도 들러볼 만하다.

무주 구천동 33경 중 하나인 제4경 와룡담의 ‘거북바위’. 커다란 거북이 강가에 나와 물속으로 뛰어드는 모습이다.
무주 구천동 33경 중 하나인 제6경 일사대의 모습. 구천동 33경에서도 3대 경승지 중 하나로 손꼽힌다. 수성대라고도 하는데, 서벽정 서쪽에 우뚝 솟은 기암이 배의 돛대 모양을 한 절경으로 구한말 학자 연제 송병선이 이곳에 은거하며 푸른바위의 깨끗함과 의젓함을 들어 일사대라 이름지었다. 지금은 출입이 통제되어 일반인은 먼 발치에서만 볼수 있다.
태권도원 전망대로 가는 전동차.
안국사 입구.
적상산 정상의 피나물 군락지. 일명 노랑매미꽃으로 불린다. 노란색 꽃받침은 윤기가 흐르고, 꽃잎이 밝고 화사하다. 나무가 우거지고 습기가 많은 곳을 좋아해 적상산 깊은 산길에서 만날 수 있다.
향로봉 정상에서 내려오는 길에서 바라본 안국사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