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休] '빛과 그늘의 도시' 부산…풍경의 양극화를 보다

by이승형 기자
2012.10.30 07:05:52

[이데일리 이승형 선임기자] 태초에 이 곳엔 빛이 있었다. 그리고 이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그늘 또한 있었다.

두 얼굴을 가진 도시, 부산. 여느 도시가 다 그러하지만 부산의 명암은 그 대비가 더 뚜렷해서 현기증이 난다.

요란하고 소란스러운 해변이 있는 반면, 소박하고 차분한 바닷가가 있다. 화려한 꽃 장식으로 으스대는 커다란 호텔 뒤에는 인공 방향제가 뿌려진 싸구려 모텔들이 있다.

대기업들이 지은 높다란 아파트들이 키재기를 하지만, 산기슭에 자리한 달동네 집들은 서로가 떨어질까 두려운 듯 다닥다닥 붙어 있다. 이렇게 풍경에도 양극화가 있다.

부산은 분명 야누스다. 그래서 사람사는 냄새가 풀풀 나는 도시다. 인생의 수억개 아픈 사연으로 죽을 것 같은 사람이라도 이 곳에 오면 기를 듬뿍 받아 회생할 것만 같다.

광안리해수욕장의 눈부신 야경. 이 곳은 부산의 ‘빛’에 해당한다. 이승형 선임기자
국제영화제가 막을 내리고, 가을 야구도 끝났건만 이 도시의 흥은 도무지 가라앉을 줄 모른다. 그 패기를 가장 많이 즐길 수 있는 곳이 그 유명한 광안리다.

지난 25일 밤 10시쯤 찾은 광안리 해변은 사람과 바다, 건물들이 만들어내는 시끌벅적한 조합으로 한껏 들떠 있었다. 1.4km 길이의 백사장 한 켠에는 부둥켜 안은 연인들이 있고, 또 한 구석엔 밀려오는 파도에 달음질 치는 아이들도 있다.

“아무리 그래도 부산에 오면 광안리는 함 구경해야지예. 야경이 진짜 이쁘지 않습니꺼? 그런데 쪼매 정신이 없네예.”

토요일에 있을 불꽃 축제를 보기 위해 대구에서 이 곳을 찾았다는 주부 정미영씨는 인파 속에서 남편을 놓칠세라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광안리 구경 거리는 오색 빛깔의 광안대교와 빌딩숲도 있지만 그 중 최고는 사람이다. 국제도시임을 인증이라도 하듯 각양 각색 인종들이 거리에 넘쳐 난다. 바다가 없었다면 이 곳은 이태원과 일란성 쌍둥이다.

바다를 바라보며 쪼르르 서 있는 유흥 주점들에는 황인, 흑인, 백인들이 뒤 섞여 놀고 있다. 이들은 마치 밤새도록 술을 마실 기세인 양 연신 술을 들이키고, 잡담을 나눈다.

“이번 주말이 할로윈 파티의 절정이어서 흥분되는데요. 친구들과 어떤 복장을 할 지 얘기하고 있어요.”

초록색 눈이 매력적인 영국인 여대생 도트리의 양 볼이 빨갛다. 자정이 넘도록 광안리의 호사스런 밤은 끝날 줄 모른다.

송정해수욕장의 아침 풍경. 이름 송정(松亭)답게 저 멀리 소나무 숲과 정자가 보인다. 해변에는 낚시꾼이 걸어가고 바다에는 서퍼가 카누를 젓고 있다. 이승형 선임기자


오전 7시. 아침을 맞는 부산 해운대구 송정해수욕장은 고요하기 그지없다. 전날 밤 먹은 술로 쓰린 속을 이 곳의 풍경이 달래준다.

14만명 수용이 가능하다는 이 넓은 백사장에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서퍼 대여섯명과 낚시꾼 한명, 그리고 아침 운동 나온 아주머니와 그녀의 강아지 한 마리.

“그래도 여름에는 제법 많습니더. 요즘엔 마, 당연히 한가롭지요. 민박 치는 집들이 다 놀고 있으니까.”

담배 가게 아저씨가 말한다. 바닷가 명당 자리는 모텔들이 차지했지만 그 뒷골목에는 허름하지만 깔끔한 민박집들이 꽤 있다. 혹여 손님이라도 올 세라 아침 댓바람부터 문 앞 의자에 앉아 골목 귀퉁이만 바라보고 있는 한 할머니의 모습에 왠지 코끝이 찡하다.
송정역과 해수욕장에 사이에 있는 민박집들. 지팡이를 짚고 있는 할머니가 오지 않는 손님을 기다리며 골목 어귀를 바라보고 있다. 이승형 선임기자




송정에는 간이역이 있다. 문화재청으로부터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송정역. 1940년 지어진 목조 단층 기와 지붕 건물.

이 곳에 오니 귀에 거슬리는 잔소리가 없다. 그저 들려오는 건 백 발자욱 건너편 파도소리와 초등학교 담장 너머 아이들의 웃음소리뿐. 아, 그리고 때마침 지나가는 조그만 트럭 스피커에서 흘러 나오는 향수어린 소리.

“고장난 테레비 파세요.”

여전히 귀에 남아있던 광안리의 북적거렸던 소음은 이 곳 송정에서 말끔히 해장된다.
철로에서 바라 본 송정역. 입구는 바다로 향해 있다. 이승형 선임기자
어릴 적 산비탈 골목길을 한걸음에 내달렸던 기억이 이 곳에서 되살아난다. 부산 사하구 감천2동. 수백개의 골목과 또 수백채의 집으로 이뤄진 마을. 냄새로 옆집의 저녁 반찬을 알고, 소리로 앞집 부부의 사이를 알 수 있는 곳.
감천동 골목길. 사람 한 명 겨우 지나다닐 만큼 좁아도 정겹기만 하다. 이승형 선임기자
한국전쟁 이후인 1958년 4000여명의 태극도 신도들이 모여 만든 집단촌이 지금의 달동네가 됐다. 앞집이 뒷집을 가리지 않게 지어져 동네 어디에서도 멀리 감천항 앞바다를 볼 수 있다. 그만큼 인심이 후하다는 증거.

오후 1시쯤 이 마을 어귀는 여느 때와 달리 드나는 사람들이 많다. 이날부터 일요일까지 열린다는 ‘골목축제’ 때문. 하지만 몇 걸음 골목길에 들어서니 고양이만 햇볕을 쬐고 있고 빨래들만 펄럭일 뿐 인적없이 평화롭다.

사람 하나 지날 만큼 좁은 골목길을 이리 틀고 저리 틀어 언덕 위에 오르면 파란 색 지붕의 레고같은 집들이 한 눈에 펼쳐진다. 만일 어떤 집을 가리켜 누가 먼저 그 집에 도착하나를 두고 내기를 하면 딱 좋을 미로같은 골목들.

혹자들은 이 마을을 두고 그리스의 산토리니라고 말하지만 모두가 동의하지는 않을 것 같다. 이 곳은 가진 사람들의 마을이 아니기 때문이다.

분명 예쁜 동네지만 마냥 예쁘다고 할 수 없는 애환이 느껴진다. 도시인들은 이 곳에서 애처로운 골목의 추억을 떠올리지만 그렇다고 여기에서 눌러 살지는 않는다. 그 옛날 골목대장은 이제 여기 없다.
감천동 문화마을. 한 소녀가 옥상 위에서 이불 빨래를 널고 있다. 이승형 선임기자


부산을 비롯한 경상도 사람들은 서울에 오면 당황하는 게 하나 있다. 소금에 찍어 먹는 순대 때문이다.

“처음에 서울 와서 그걸 보고는 깜짝 놀랐어요. 아니, 그걸 퍽퍽해서 무슨 맛으로 먹어요? 순대는 당연히 장에 찍어 먹어야지.”

부산이 고향인 여자 후배는 순대를 먹을 때마다 볼멘 소리를 한다. 부산에서는 송송 썰은 양파와 고추를 곁들여 순대를 막장에 찍어 먹는다. 장을 머금은 순대는 입안에서 촉촉한 질감을 줘서 목이 메이거나 하지 않는다.

국제시장 먹자골목에는 할머니들이 내놓는 막장 순대 좌판이 즐비하니 부산에 가면 들려보는 것도 좋다.

부산에서 또 하나의 먹을거리는 완탕이다. 완탕은 얇게 편 만두피에 속을 넣은 음식으로 중국에서 즐겨 먹는다.

하지만 1948년에 개점한 남포동 ‘18번 완당집’(051-245-0018)은 한국식 완탕을 끓여 판다. 이름도 그래서 완탕이 아닌 완당이다. 0.1mm의 초박형 만두피에 다진 고기와 야채를 넣은 속은 목구멍으로 술술 넘어간다. 한 그릇에 6000원이며, 유부초밥과 김초밥, 모밀국수를 곁들인 세트 메뉴들도 있다.

부산에는 시원한 국물과 쫄깃한 면발이 일품인 밀면도 있다. 생김새는 냉면과 비슷하지만 면발이 부드러워 가위를 사용하지 않는다. 가위를 사용하면 밀면 특유의 맛이 사라진다.

수영구 남천동 본가밀면(051-628-7577)이나 서면에 있는 춘하추동(051-809-8659)이 밀면으로 소문난 집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