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악한 근로환경이 불러온 '유산율 미스테리'

by장종원 기자
2013.05.08 06:25:41

유산율, 직장여성>전업주부-20대 직장인>30대 직장인
간호사, 서비스업 종사자 취약..사회배려 못받아
출산전 휴가·태아검진 시간, 현실에선 무용지물

[이데일리 장종원 기자] 국내 모 은행에 다니는 박모(32)씨는 얼마전 유산으로 아이를 잃는 아픔을 겪었다. 주위 동료들의 유산 소식을 접하면서 불안한 마음이 있었지만 설마 자신에게까지 비극이 벌어질지는 예상못했다. 전화로 많은 민원인들을 상대하고, 마감 시간에 맞춰 쫓기듯 근무하다 쌓인 스트레스가 유산의 원인이 아닐까 생각만 할 뿐이었다. 그는 “주위 동료를 보면 절반 가까이는 유산을 경험한 것 같다”면서 “임신을 하면 유산부터 걱정하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직장여성의 유산율이 전업주부에 비해 최대 80%까지 차이가 난다는 것은, 우리나라 기업문화와 근로환경이 그만큼 임신한 여성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는 반증이다.

휴일까지 포함하는 장시간 근무, 휴가를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분위기, 높은 비정규직 비율 모두 임신 직장인에 불리한 조건이다. 특히 여성들이 많이 종사하는 간호직, 판매직, 서비스업종은 특히 유산 위험이 크기 때문에 배려 받아야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

정진주 사회건강연구소장이 수행한 ‘여성근로자의 작업환경과 근로형태가 임신, 출산에 미치는 영향’ 연구에 따르면 간호사와 같이 교대 근무를 하는 직업군의 조산 위험성이 그렇지 않은 군보다 9.8배가 높은 것으로 보고됐다. 무거운 짐을 옮겨야 하는 직업군의 조산 위험성은 1.5배에 이른다.

정 소장은 “오래 서 있거나 야간 근무를 하거나 2교대를 하는 직업군은 유산 가능성이 더 높다”면서 “간호사들의 유산율이 높은 것도 이 같은 이유”라고 설명했다. 제조업에 종사하는 직장여성이 금융업이나 사회 및 개인 서비스업에 비해 자연유산율이 각각 2.67배와 2.11배 높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건강한 출산을 돕는 출산 전후 휴가제, 육아휴직, 시간외 근로 강요금지, 태아검진시간, 해고 금지 등의 법조항은 현실에서는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지난해 6월 어린이집,사회복지기관 등 30인 미만의 영세기업에 다니는 여성 2351명을 조사한 결과, 단 26.8%만이 법으로 보장한 태아검진시간을 활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연차나 휴가를 활용해 검진을 받는다는 응답이 26.6%였고 태아검진, 월차휴가 모두 사용한 적이 없다는 응답도 47.5%에 이른다.



또 산전후 휴가를 사용한 비율도 52.3%에 불과했다. 사용한 이들 중에서도 절반 정도(51.9%)만이 법으로 보장한 90일을 사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김영옥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여성근로자의 모성보호와 일가정 양립을 위한 여러 제도들이 개발되고 진화를 계속하고 있지만 여성근로자의 현실을 보면 가장 기본적인 제도인 ‘90일 산전후휴가’ 조차 보장된다고 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오히려 임신을 이유로 사직을 권유받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면세점에서 판매직으로 근무하는 30대 A씨는 임신 5개월째 회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유산 가능성이 있다는 의사의 권유로 휴가를 냈으나 회사는 뒤늦게 ‘질병이 아니기 때문에 병가를 줄 수 없으며 무급휴직도 안된다’며 사직을 강요했다. 알고보니 이미 가짜 사직서를 만들어 처리하고 후임까지 뽑은 상황이었다.

이번 통계에서 20대 직장여성의 유산율이 30대 직장여성의 유산율 보다 높은 것은 ‘미스테리’다. 고령일수록 유산율이 높다는 일반적인 상식으로 비켜가기 때문이다. 준비되지 않은 임신에 대한 스트레스, 초산에 따른 유산 위험 등 다양한 원인이 지적되지만 우리나라 노동시장 구조와 연계한 분석도 있다.

부산여성회 박경득 평등의 전화 소장은 “30대 직장여성은 취업한지 몇년이 지나 안정권에 접어든 시점이어서 그나마 고용의 질이 낫기 때문에 유산율이 20대보다 낮은 것일 수 있다”고 말했다.

직장여성의 높은 유산율은 개선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각종 정책과 제도를 만들어도 기업에서 동참하지 않으면 헛수고에 불과하다. 박근혜 정부의 임신부 단시근로제 도입 국정과제가 자칫 저임금 임신 근로자만 양산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배진경 여성노동자회 사무처장은 “법과 제도로 임신한 직장여성에 대한 배려를 해도, 실제 일터에서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것이 문제”라면서 “장기적이지만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을 배려하는 사회 분위기 조성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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