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하정민 기자
2006.11.17 06:28:45
노벨상 수상자 밀튼 프리드먼 94세로 타계
[뉴욕=이데일리 하정민특파원]
20세기가 배출한 위대한 경제학자 한 명이 사망했다. 자유시장경제의 신봉자이자 통화주의 경제학파의 창설자인 밀튼 프리드먼 교수가 16일(현지시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향년 9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정부의 과도한 시장 개입을 줄이고, 모든 경제 활동을 시장에 맡겨야 하며, 경제 정책의 최우선 목표는 화폐 가치 안정에 있다는 통화주의(Monetarism)를 제창해 위대한 경제학자 중 한 명으로 손꼽히고 있다.
프리드먼은 이같은 공로로 지난 1976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오랫동안 시카고 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세계의 유망 경제학도들을 시카고 대학으로 불러들였고 그 유명한 시카고 학파를 창출했다. 프리드먼의 통화자유주의 경제학은 1970년대 이후 닉슨, 포드, 레이건, 부시로 이어지는 미국 공화당 정부의 경제 정책의 근간을 이루고 있기도 하다.
프리드먼의 자유통화주의 경제학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경제학계의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러나 1970년대 초부터 점차 많은 추종자를 얻기 시작했고 이후 서구 경제학계의 주류를 자유주의로 변모시킬만큼 큰 영향력을 얻었다.
경제학자로서 프리드먼의 공은 화폐 이론에서 가장 빛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케인즈는 대공황을 예로 들어 경제 부흥에 있어 화폐 정책은 무력한 반면 재정 정책은 아주 유효하므로 정부가 경제활동에 보다 광범위하고 강력하게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프리드먼은 세계 경제가 대공황에 빠지게 된 것은 경제 활동이 위축되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중앙은행이 통화 공급량을 대폭 감소시킴으로써 극심한 금융 경색을 야기시킨 것이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화폐 정책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재정 정책의 중요성만 강조한 케인즈의 주장은 옳지 않다는 의미다.
때문에 프리드먼에게는 `흔들림 없는 자유주의자`, `자유경쟁체제의 굳건한 옹호자`, `통화주의의 대부`, `작은 정부론의 기수`, `반(反) 케인즈 학파의 창시자` 등 다양한 이름이 따라다닌다.
프리드먼은 20세기의 아메리칸 드림이 무엇인지를 온 몸으로 보여준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1912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우크라이나 출신의 가난한 유태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15살 때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가뜩이나 빈곤한 가정 형편은 더욱 나빠졌고 때문에 그는 장학생으로 인근 뉴저지의 럿거스 대학에 입학한다.
프리드먼은 젊은 시절부터 토론을 매우 좋아해 토론에서는 아무도 그를 당할 자가 없다는 평가를 얻기도 했다.
우수한 성적으로 학부를 졸업한 그는 시카고 대학에서 석사 학위, 컬럼비아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35년부터 10년간 미국 재무부, 전미경제연구소(NBER), 국립자원위원회 등에서 근무했고 1946년 시카고 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약 30년간 교수로 재직했다. 이 기간 동안 시카고 학파의 대부로 군림하며 쟁쟁한 경제학자들을 길러냈다.
프리드먼은 1977년 당시 경제학계의 떠오르는 샛별 로버트 루카스(1995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에게 자리를 물려주기 위해 시카고 대학을 떠났다. 이후 스탠포드 대학의 후버 연구소로 자리를 옮겨 샌프란시스코에 머물렀다.
프리드먼 일가(一家)는 가족 대부분이 경제학자인 것으로도 유명하다. 1938년 결혼한 그의 아내 로즈 역시 경제학자로 그녀는 인생과 학문 양면에서 밀튼 프리드먼의 좋은 동반자 역할을 담당했다. 프리드먼의 유명 저서인 `자본주의와 자유(Capitalism and Freedom)` 도 아내 로즈와 공동 저술한 것이다.
아들 데이빗 프리드먼도 경제학자다. 데이빗 프리드먼은 원래 물리와 화학을 공부했지만 경제학으로 전공을 바꾼 후 캘리포니아 산타클라라 대학에서 경제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프리드먼은 1976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식장에서 "지금 스웨덴인 몇 명이 내린 평가보다 50년 후 동료 경제학자들이 내릴 평가가 더 무섭다"고 말해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일견 거만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죽는 날까지 진리 탐구의 고삐를 늦추지 않겠다는 뜻을 내포한 한 마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