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3저의 역설]④글로벌 침체에 울상인 수출기업들
by김정남 기자
2016.01.19 05:01:00
초저유가 산유국 발주 축소…건설 ''역(逆) 오일쇼크''
"우리기업, 3저 호재 이용할 수 있는 실력 떨어졌다"
| 198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중반 원화약세 상황의 파급효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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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12.5%. 11.9%. 지금은 믿기 어려운 수치이겠지만 우리나라가 지난 1986~1988년 실제 기록했던 연평균 경제성장률이다. 이른바 ‘3저(저유가·저금리·원화약세)’ 덕이었다. 그런데 최근 우리 경제에 다시 ‘신 3저’가 찾아왔지만 환호성은 들리지 않고 아우성만 점점 커질 뿐이다. 왜 그럴까. 이데일리가 연초부터 요동치는 우리 경제를 짚어봤다. [편집자주]
[세종=이데일리 박종오 기자, 김정남 기자] 중동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가 올해 인프라·정보망 부문에 책정한 정부 예산은 64억달러다. 지난해 168억달러에서 62% 급감했다. 국내 건설기업이 해외시장 진출 이후 최근까지 이 나라에서 따낸 누적 공사수주액은 1338억달러(지난 15일 기준). 전체 중동지역 누적 수주액의 33.6%, 역대 해외공사 수주액의 18.5%다. 하지만 최근 초(超)저유가 여파로 재정 여력이 축소돼 플랜트 등 공사에 쓸 돈을 대폭 삭감한 것이다.
이라크는 올해 정부가 집행할 세출 예산을 897억달러로 계획했다. 세입 예산인 692억달러를 200억달러 이상 웃돈다. 모자라는 돈은 외국 차관 등을 통해 메워야 하는 만큼 대규모 공사 발주를 줄일 것이 불 보듯 뻔하다. 해외건설협회 관계자는 “산유국 재정수지가 악화하면서 대규모 건설 프로젝트가 지연되거나 취소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면서 “국제유가가 2014년 중반부터 70% 정도 내린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했다.
국내 건설업은 물론 조선·철강업 등 해외시장 진출의 최전선에서 활약해온 기업의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초저유가로 인한 산유국 발주 물량 축소, 원자재 수요 감소 때문이다. 이른바 ‘역(逆) 오일쇼크’다.
19일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기업의 해외건설공사 수주액은 461억달러로, 1년 전보다 30.2%(199억 달러) 줄었다. 지난 2007년(398억 달러) 이후 8년 만에 최저치다.
중동 수주 실적은 2014년(314억달러)의 절반 수준인 165억달러에 불과했다. 총 사업비 100억달러가 넘는 카타르 알카라나·알세질 석유화학단지 건설 프로젝트를 비롯해 사우디아라비아가 추진해온 라스타누라 청정에너지 플랜트 공사 등 굵직한 공사 발주가 줄줄이 연기 또는 취소된 영향이다.
올해 위기감은 더 크다. 저유가가 장기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어서다. 대형 건설사 대표들도 일제히 비상경영을 선언했다. 황태현 포스코건설 사장은 신년사에서 올해를 ‘위기 경영의 해’라고 못 박았다. 최광철·조기행 SK건설 사장은 “전례 없이 혹독한 시장 환경과 마주치게 될 것”이라고 했다. 해외건설협회 자료를 보면 올해 들어 이번달 중순까지 해외공사 계약액은 19억달러다. 지난해(21억달러)보다 10% 줄었다. 공사 건수도 42건에서 27건으로 쪼그라들었다.
손태홍 한국건설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사우디와 이란의 증산 경쟁에 따른 공급 과잉, 중국의 원자재 소비 감소, 이슬람국가(IS) 테러 위협 등 현재 해외건설시장은 호재보다 악재가 많다”고 했다.
건설업뿐만이 아니다. 우리 산업의 주력인 조선업도 울상이다. 수출입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1~11월 누적 전 세계 조선 발주량은 2936만CGT(표준환산톤수), 발주액은 647억달러였다. 전년 동기 대비 각각 25.7%, 35.9% 감소한 수치다. 특히 초저유가 탓에 해양플랜트 산업 침체가 장기화할 것으로 보인다. 철강업계 역시 수출이 걱정이다. 저유가로 원료비용 부담이 줄어들겠지만 그 이상 신흥국이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보이는 탓이다.
국내를 대표하는 글로벌 기업인 삼성전자(005930)와 현대차(005380)도 삐거덕대기는 마찬가지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4분기 업계 성수기임에도 영업이익 상승세가 5분기 만에 꺾였다. 지난해 4분기 잠정 영업이익은 6조1000억원으로 시장 전망치(6조원 중반대)에 미치지 못했다. 전세계 스마트폰 태블릿PC 등의 수요 하락 탓에 ‘캐시카우’인 반도체마저 하락세를 보였다.
현대차는 7년 만에 판매목표를 낮췄다. 유가 하락 여파로 가뜩이나 러시아 브라질 등에서 부진한데, 중국마저 침체에 빠질까 노심초사하고 있다.
구본무 LG(003550) 회장은 최근 신년사에서 “세계 경제의 저성장 기조와 환율 유가의 불안정 등 어려운 경영환경이 상당기간 지속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의례적인 표현으로 보기에는 상황이 엄중하다.
저유가는 우리 경제에 나쁠 게 없다. 우리나라는 원유를 전량 수입한다. 1980년대 후반 3저 호황도 이에 기반했다. 그런데 상황이 바뀌었다. 저유가가 산유국 등 신흥국 경제를 어렵게 만들었고, 전 세계 수요 자체도 떨어졌다. 수출 비중이 큰 우리나라로서는 악재다.
윤석헌 숭실대 금융학부 교수는 “최근 저유가는 중동 분쟁, 셰일가스 등장 등으로 인한 공급쪽 영향도 있지만 세계 경제가 활성화하지 못하는 수요쪽 영향도 크다”고 했다.
원화 가치가 떨어지는 상황도 이와 무관치 않다. 우리 기업의 가격 경쟁력이 올라갈 수 있지만, 수요 자체가 침체하는 탓에 큰 힘을 못 쓰고 있다.
박종규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유가(가장 중요한 생산비용 요소), 금리(자본의 가격), 환율(우리나라 경제가치) 등의 3저는 가격체계가 달라진 것인데, 그게 변해도 우리의 산업구조가 말을 듣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여권 내 경제통인 이한구 새누리당 의원은 “우리 기업이 3저 호황을 이용할 수 있는 실력이 떨어졌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