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섭 칼럼] ‘조선책략’을 다시 생각한다

by허영섭 기자
2015.09.04 03:00:00

19세기 말 조선이 처한 위치에서 당면한 대외 전략을 제시한 것이 ‘조선책략’(朝鮮策略)이다. 남쪽으로 세력을 뻗치던 러시아를 막으려면 중국과 친하게 지내고(親中國), 일본과 결합하며(結日本), 미국과 연결해야 한다(聯美國)는 것이 그 골자다. 1880년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된 김홍집이 청나라 참사관인 황준헌(黃遵憲)에게 전달받은 책이다.

중국은 조선과 거리가 가깝기 때문에 우호를 증대해야 하며, 일본은 중국 다음으로 가까운데다 과거부터 교류해 왔으므로 결합이 필요하다는 논지다. 미국의 경우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약소국을 도우려 하니 서로 연결한다면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할 수 있다고 했다. 중국이 러시아의 확장을 막으려고 조선을 빌미로 미국을 끌어들이려는 의도였지만 당시 한반도 주변 정세에 대해서는 비교적 정확한 처방이 아니었나 여겨진다.

문호 개방은 그 결과였다. 조선이 일본과의 강화도수호조약(1876년) 이후 구미 각국과 연이은 통상조약으로 문호 개방에 박차를 가했던 데는 이런 훈수가 작용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변화하는 국내외 정세에 대응하기 위해 통리기무아문이 설치되는 한편 신식 군대인 별기군이 편성됐다. 일본에는 신사유람단을, 청나라에는 영선사를 파견하기도 했다. 쇄국의 빗장이 풀어지던 과정이다.

물론, 조선이 문호개방 정책으로 전환했다고 해서 국가 운명이 크게 달라졌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조선에 접근해오는 열강들마다 속셈이 있었으나 조선은 그에 대응할 만한 방책이 부족했다. 국력은 쇠퇴했고, 지도자들은 무능했기 때문이다. 결국 명성황후가 일본 자객들에 의해 시해된 데 이어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사태까지 이르고 말았다.

문제는 그로부터 130여년이 흐른 지금 시점에서도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지형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남북한이 갈라진 데다 북한이 핵개발 의욕을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더욱 복잡해진 양상이다. 외부적으로도 러시아가 소련연방의 붕괴로 세력이 약해졌을망정 여전히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의 회원국으로 관여하고 있다. 일본도 당시 제국주의와 유사한 극우 움직임을 나타내는 중이다.



‘친중국‘ 관계는 갈수록 강화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서방국 지도자들이 불참하는 가운데서도 중국 전승절 행사에 참석해 시진핑(習近平) 주석과 정상회담을 가진 것은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최근 북한과의 긴장 국면에서도 중국의 입김이 주효했다. 우리 총수출의 30%를 중국에 의존할 만큼 경제적 관계에서는 더욱 긴밀해졌다. 중국이 기침을 하면 감기 정도가 아니라 아예 몸살을 앓아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중요한 것은 급격히 변화해 가는 국제정세 속에서 각국 사이에 어떻게 균형추를 맞추느냐 하는 점이다. 어느 한쪽에 치우칠 경우 필경 다른 상대방의 견제를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끝내 나라를 통째로 빼앗겨 일제의 압제 속에서 신음해야 했던 지난날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앞으로도 한반도 통일 과정에서 유사한 사례가 반복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다시 조선책략으로 눈길을 돌려본다. 그때 조선이 중국과 가장 가까운 사이였는데도 왜 굳이 ‘친중국’ 정책을 강조했을까 하는 점이다. 조선의 개방을 권유하면서도 대외 문제만큼은 자신의 관할 아래 붙잡아 두겠다는 의도였다. 조선이 미국과의 조약체결(1882년)에 앞서 미리 중국에 사신을 보내 이홍장(李鴻章)과 논의를 했던 데서도 확인되는 사실이다.

이번에는 박 대통령의 방중에 앞서 윤병세 외교부장관이 미국 존 케리 국무장관을 만나 배경 설명을 했다는 점에 관심이 쏠린다. 내달에는 오바마 대통령과의 한·미 정상회담도 예정돼 있다. 일본과의 관계도 계속 밀고 밀리는 모양새다. 상황은 다소 달라졌더라도 조선책략의 기본 구도는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