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인터뷰]“쉽게 상처받는 그대… 너무 큰 희망 가졌던 건 아닌지”

by김용운 기자
2013.08.16 07:00:00

김성수 성공회 주교 인터뷰
"세상 잘못 돌아가는 건 다 어른들의 탓"

김성수 주교
[이데일리 김용운 기자]“오후에 가겠습니다.”

“아니에요. 일찍 와서 밥 먹고 가요. 밥을 같이 먹어야지.”

노익장이 느껴지는 건장한 음성은 아니었다. 하지만 전화기 너머 대한성공회 김성수 주교의 목소리는 여든 세 살의 인생이 차곡하게 발효돼 온화하고 은은했다. 멀리 시골집 외할아버지의 목소리처럼 잔잔히 밀려들었다. 부담스러울까 몇 번 거절했지만, 결국 김 주교와 점심을 먹으며 인터뷰를 하게 됐다. 김 주교를 만나기 위해 강화도 길상면 온수리에 위치한 지적장애인 자립시설인 ‘우리 마을’로 가는 길은 비구름으로 어두웠지만 마음은 환했다.

김 주교는 우리 사회에서 존경받는 원로다. 성공회 국내 신자는 10만 명이 채 안 된다. 서울 대형교회 신자 수에도 못 미친다. 하지만 김 주교가 우리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크다. 1970년대부터 성베드로학교를 통해 장애인의 인권과 교육에 일찌감치 관심을 쏟았다. 군부정권을 종식시킨 1987년 6월 항쟁은 당시 김 주교가 있던 서울 성공회 주교좌 성당에서 시작됐다.

김 주교는 이후에도 사회연대은행·푸르매재단·반부패국민대 등에 참여하며 성직자이자 시민운동가로서의 삶을 살았다. 김 주교는 2000년대 초반 성공회대학의 총장을 맡아 ‘할아버지 총장님’으로 불리며 허물없는 모습으로 학생과 교직원들 사이에서 신망을 얻었다. 신영복 교수를 비롯해 진보적인 교수들을 영입하며 성공회대학의 학풍을 대외에 널리 알렸다. 현재는 선친에게 받은 땅을 기부해 지은 우리 마을의 촌장을 맡아 50여명의 지적장애인들과 함께 어울려 살고 있다. 이러한 공로로 올해 만해사상선양위원회는 김 주교를 만해대상의 평화부문 수상자로 결정했다. 정작 자신은 이런 시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했다.

“부끄럽지. 그게 다 기자들이 잘 써 준 덕분이야. 내가 한 건 아무것도 없어. 진정한 어르신들은 이제 다 돌아가셨어. 김수환 추기경이나 함석헌 선생이나 그런 분들에 비하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야.”

화제를 돌렸다. 최근에 일어난 여러 사건들과 현안에 대한 김 주교의 의견을 물었다. 우리 사회에 대한 김 주교의 관심과 애정은 여전했다.

“사실 세상이 잘못 돌아가는 건 다 어른들 탓이지. 젊은 사람들은 죄가 없어. 어른들이 탐욕에 물들고 뭐든지 남 핑계를 대고 자기 이야기만 하니 문제가 자꾸 커져. 그래놓고는 그 책임을 계속 젊은 사람에게 돌리는 게 참 안타까워”

김 주교는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진 반면 과연 사람이 살맛 나는 세상인지 걱정이 된다고 했다. 김 주교는 어른들부터 “내 탓이오” 하며 거듭나야 사회가 제대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내 이야기가 뻔한 거 알지만 정말 그래. 특히 요즘 더 염려되는 건 ‘내 아이만 잘 키우겠다’는 사회 분위기야. 아이를 키우는 데 엄격해야 하는데 이게 무너졌어. 어른들이 젊은 사람들에게만 ‘너희들이 나쁜 놈이다. 너희들이 잘못했다’ 하니 문제가 해결되질 않아.”

김 주교는 사회 지도층의 비리들도 상당 부분 자식에 대한 부모의 욕심 때문에 촉발됐다며 대형교회의 목사를 비롯해 이름을 대면 알만한 이들의 예를 들었다.

김 주교에게 어떻게 자녀를 양육했는지 물었다. 성공회는 사제들의 결혼을 허용한다. 김 주교는 1969년 일본에서 열린 한일청년선교대회에 참석해 그곳에서 부인인 후리다 여사를 만나 1남 1녀를 뒀다. 후리다 여사는 영국인이다.

“우리 집이야 말로 다문화 가정의 선구자였어. 아이들이 남과 다른 외모로 많이 고생도 많이 했는데 아빠로서는 빵점이었지.”



김 주교는 아버지로서 아이들과 겪었던 갈등도 스스럼없이 털어놓았다. 장성한 아들이 교수직을 버리고 딴 일을 찾았을 때 화가 나서 한동안 쳐다보지도 않았다고 했다. “말을 하다보면 또 부끄러워져. 나 스스로도 잘 하지 못하면서 남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건 아닌가? 사제로서 잘 살고 있는 건가? 또 ‘부끄럽다’는 말로 남들에게 내 위선을 가리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점심시간이 되어 우리 마을 구내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김 주교와 함께 식판을 들고 주방에 앞에 서자 줄을 섰던 지체장애인들이 “할아버지”라고 부르며 반겼다.

우리 마을은 김 주교가 지적장애인 학교인 성베드로 학교 교장시절, 졸업한 학생들이 갈 곳이 없는 것을 지켜보다 10여년 전 물려받은 선산을 기증해 지은 지적장애인 시설이다. 이 마을에는 지적장애인들이 일하는 콩나물 공장이 있어 이들의 자활을 돕고 있다. 이 공장의 월 매출액은 1억원 정도. 한 지적장애인이 김 주교를 보고 “할아버지 내 동생 결혼하는데 옷 사줬어요”라며 자랑을 했다. 김 주교가 “잘 했어”라고 등을 토닥여줬다.

식사를 마치고 장애인들과 함께 사는 삶에 대해 물었다.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우리가 그 친구들을 예단하는 경우가 많아. 그런데 장애를 가진 친구들도 우리들이 전혀 상상치 못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 어느 순간 나도 잊었던 것을 정확히 기억해서 알려주기도 해. 그럴 때마다 깜작 놀라고 소위 정상인들의 교만을 생각하게 돼. 장애인을 모자라거나 아픈 사람으로만 생각해서는 안돼. 그저 다르고 각자 개성이 있는 것이지. 그들과 더불어 살아가며 교감을 나눌 때 세상에 진정한 평화가 오는 게 아닐까?”

김 주교는 평소 나눔에 대한 생각도 이어 말했다. “나눔이란 많이 가진 사람이 행한다고 해서 커지는 것이 아니야. 돈을 벌어서 기부하겠다는 것보다 어렸을 적부터 100원을 주면 10원은 남을 위해 쓰라고 가르치는 것이 바로 나눔이지. 평소에 자신이 가진 것을 조금씩이라도 남에게 주는 게 바로 나눔이야. 그런데 자신이 가진 게 물질만은 아니잖아? 마음을 주는 것, 가서 교감을 나누는 게 더 큰 나눔이지. 이곳의 장애인들에게 필요한 것도 실은 물질적인 지원이나 도움보다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교감하는 것이야. 이게 가장 중요해.”

사제는 신과 사람을 이어주기도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 속 상처를 치유하고 보살피는 일도 중요한 소명이다. 의학이 육신을 치료한다면 종교는 사람의 마음을 치유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힐링’의 원조인 셈이다.

“사람들이 상처를 받는 것은 어찌 보면 처음부터 너무나 큰 희망을 바라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그래서 상처를 받는 거지. 바라는 것을 이루지 못해 좌절하니까. 우리는 어렸을 적부터 평범하고 착하게 사는 것을 꿈꾸면 어른들이 탐탁지 않게 여겼어. 무엇을 치유하기에 앞서 원인을 살펴야 해. 진짜 희망이란 우리 각자 자신이 할 수 있는 영역에서 작은 바람을 이루는 게 아닐까 싶어. 사회가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싶도록 유도하니까 그 박탈감이 상처를 내지.”

어느덧 시간이 두 시간 넘게 흘렀다. 마무리를 위해 자리를 정리했다. 김 주교는 “이제 밑천이 다 드러나서 인터뷰하는 것도 힘들다”며 웃었다. 그래도 하고 싶은 말씀이 더 있으실 거 같다고 하자 “다른 건 모르겠는데 역사 교육은 제발 제대로 시켰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 이야기에 조금 더 시간이 길어졌다. 특히 그는 일제시대에 대한 역사교육을 강조했다. 역사를 잊으면 반복될 수 있다고 염려했다. 사무실 책장에 젊은 시절 김 주교의 사진이 있었다. 훤칠한 미남이었다. 김 주교가 만약 20대로 다시 돌아가면 성직자 말고 무엇이 되어 인생을 살고 싶을지 궁금했다.

김 주교는 그런 질문은 처음 받아봤다며 잠시 눈을 감았다. 입꼬리가 올라가며 눈을 뜬 그는 이렇게 말했다.

“착한 소시민, 별 욕심 내지 않고 자기 할 일 묵묵히 하면서 착하게 사는…. 그거면 충분하겠지?”

김성수 주교(세례명 시몬)는 1930년 강화도 온수리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성공회에 입교한 할아버지 덕에 일찍부터 성공회 신자가 됐지만 유년시절 신부가 될 생각은 없었다. 배재중 6학년(현 고교3학년)시절 폐결핵에 걸리기 전까지만 해도 배재중의 알아주는 운동선수였다. 페결핵에 걸려 10년을 앓았고. 기적적으로 병이 낳은 뒤 성공회대 전신인 성미가엘신학원에 합격, 1964년 서른 네살에 성공회 사제가 됐다. 1990년 대주교로 서품받았고 대한성공회 초대 관구장도 역임했다. 2000년부터 8년간 성공회대 총장을 지냈다. 당시 성공회대 학생들로부터 ‘식권 할아버지’라 불렸다. 1999년 조부에게 물려받은 온수리의 땅을 기부해 지체장애인 자립시설인 ‘우리 마을’을 설립하는 데 초석을 놓았다.

김성수 주교가 강화도 길상면 온수리 지적장애인 자립시설인 우리마을 현판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