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이준기 기자
2023.05.31 05:00:00
[이데일리 이준기 산업부 차장] 조직생활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라인’이라는 말을 제법 듣게 된다. 라인을 굳이 우리말로 의역하자만 연줄·계파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인맥을 중시하는 우리 사회 특성상 드러내든 아니든 라인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 연예계에서조차 공공연히 ‘유라인’(유재석 라인) ‘강라인’(강호동 라인)이란 말을 쓰지 않나. 국제사회라고 해서 다를까. 겉으론 자유주의 진영, 권위주의 진영 등 거창한 수식어로 불리지만 따지고 보면 미국 라인(친미), 중국 라인(친중)과 다를 바가 없다.
역대 정부마다 대한민국호(號)가 어느 라인을 타야 할지는 가장 어려운 숙제 중 하나였다. 주변 4강에 둘러싸인 지리적 공간, 이로 인한 국제 권력의 상호작용이 쉴 새 없이 분출하는 지정학적 리스크, 이 모든 건 우리의 숙명이기도 하다.
최근 미국 메모리 기업인 마이크론에 대한 중국 제재는 단순 방정식으로 풀었을 땐 우리로선 득이다. 마이크론 몫을 삼성전자·SK하이닉스가 온전히 대체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 지정학적 리스크를 대입하면 머리아픈 고차 방정식으로 발전한다. 미국은 대놓고 “한국 기업은 마이크론 공백을 대체하지 마라”고 하고 중국은 “양국 간 반도체 협력을 강화하기로 했다”는 자의적 해석을 내놓으며 자국에 메모리 공급을 압박하고 있다. 업계에선 중국의 압박을 두고 ‘너희도 우리를 못 본체한다면 마이크론처럼 될 것’이란 겁박으로 느껴진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한국 정부가 기술 접근·국가안보를 둘러싼 공방에 휘말렸다”(미국 블룸버그) “삼성·SK가 미·중 반도체 전쟁의 한 복판에 들어섰다”(영국 이코노미스트) 등 우려 섞인 반응이 쏟아지는 이유다.
그만큼 지정학적 긴장관계에 따른 불확실성 증대는 한국을 기업 경영하기 어려운 나라로 만들고 있다. 그렇다고 정부에 모든 걸 기대하기도 어렵다. 과거 박근혜 정부의 중국 경사론(한국의 외교적 비중이 미국보다 중국에 기울어졌다는 의미)이 미국의 반발을, 북한의 핵미사일 방어를 위한 사드 배치 땐 중국의 보복을 샀던 데서 볼 수 있듯 아슬아슬한 ‘라인 타기’로 불리는 강대국 외교는 분명한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많은 전문가들은 고래 싸움에 등 터지지 않으려면 범접할 수 없는 ‘초격차 기술’을 갖추는 게 답이라고 조언한다. 극자외선(EUV) 공정을 유일하게 구현, 이른바 ‘슈퍼 을(乙)’로 불리는 네덜란드 ASML을 반면교사로 삼아 기초체력과 몸집·맷집을 길러야 한다는 게 이들의 논리다. 정확한 해법이긴 하다. 하지만 지금의 ASML이 스스로의 힘만으로 그 자리에 앉게 된 걸까. 네덜란드 정부의 산·학·연 네트워크 구축 노력, 이를 통한 꾸준한 연구개발(R&D) 지원 확대 등이 뒷받침하지 않았다면 아마 요원했을 것이다. 우리처럼 대기업에 대한 각종 규제는 물론 G5(미국·프랑스·독일·일본·영국, 17.6%) 대비 턱없이 낮은 R&D 세액공제율(최대 2.0%) 등의 악조건 속에선 언감생심일 뿐이다.
정부가 누구 라인을 타라고 분명한 시그널을 주지 못할 바엔 기업이 몸집·맷집을 키워 스스로 대처할 수 있게끔 그 환경만이라도 조성해 줘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규제 철폐 등 기업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에 나서야 할 적기다. 명분은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