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배용 "산사, 서원에 이어 우리의 고택...세계유산 가치 있다"

by고규대 기자
2019.07.08 00:05:00

한국의서원통합보존관리단 이사장 맡아
한국의 서원,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주역
"사람답게 사는 법..서원은 가치의 공간"

이배용 (재)한국의서원통합보존관리단 이사장.(사진=방인권 기자)
[이데일리 고규대 기자] “단연 ‘한국의 서원’이 A+ 점수를 받았다고 단언합니다. ‘한국의 서원’에 대해 충분하고 완벽한 역사적 자료를 확보하는 데 한몫했고, 그 결과물이 인정 받아 세계유산이 됐다는 게 개인적인 자부심입니다.”

7일 오전 8시. 휴대폰 너머로 들리는 이배용 (재)한국의서원통합보존관리단 이사장(전 이화여대 총장)의 목소리에는 힘이 넘쳤다. 전화가 연결된 현지시간은 한국보다 5시간 늦은 오전 3시였다. 이 이사장은 아제르바이잔 수도 바쿠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결정하는 세계유산위원회(WHC)참석차 현지에서 머물고 있다. ‘한국의 서원’이 불과 몇 시간 전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기쁨에 잠을 설쳐 일찍 일어났다. 그동안 모았던 서류를 훑어보다 인터뷰 요청을 받고 선뜻 이른 시간에 전화를 걸어왔다.

“유교 관련 문화유산이 유네스코에 많이 등재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중국과의 비교 연구 등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아 최종 인준을 받게 됐다는 게 아주 자랑스러운 일이죠.”

이 이사장은 2010년 국가브랜드위원회 2기 위원장으로 일할 때 한국의 산사, 서원 등의 세계유산 등록을 추진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은 유형(문화·자연), 무형, 기록문화로 나뉜다. 이 이사장은 지난 2018년 6월30일 전통 사찰인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유형 문화)에 등재한 데 한몫을 했고, 이번 ‘한국의 서원’ 등재에도 한국의서원통합보존관리단 이사장으로 힘을 보탰다. 문화재청의 총괄 아래 각 지자체와 서원, 그리고 유림을 연결하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활약했다.

이 이사장은 이화여대 사학과 출신이다. 대학 1학년인 1965년 1학기 강화도 전등사로, 2학기 소수서원으로 답사를 간 기억을 떠올렸다. 이 이사장의 표현대로 “산사와 서원을 접하면서 어릴 때지만 굉장한 자긍심을 갖게 됐다.” 이화여대 총장 재직 시절 각국의 자매학교 총장을 초청하면 산사나 서원을 방문 코스에 넣기도 했다.

“이화여대 총장 때 부시 전 대통령이 2009년 병산서원을 방문할 때 함께했죠. 많은 외국 유명인사들이 자연과 어울린 우리 산사나 서원의 아름다움에 매료되더라고요. 서원은 단순히 공부하는 공간만이 아니에요. 강학의 공간, 제향의 공간, 유식의 공간이죠. 자연과의 함께 사람이 어떻게 사람답게 사느냐, 그 가치를 담은 공간입니다.”

한국의 서원.(출처=문화재청 페이스북)
세계유산위원회는 한국의 서원에 대해 “오늘날까지 교육과 사회적 관습 형태로 지속하는 한국 성리학과 관련된 문화적 전통의 증거”라며 “성리학 개념이 여건에 따라 변화하는 역사적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세계유산 필수 조건인 ‘탁월한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 OUV)가 인정된다”고 평가했다. 세계유산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는 모두 10개다. 이 가운데 한국의 서원은 세 번째인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을 충족했다.



지난 5월 한국의 서원은 세계문화유산 후보지를 사전 심사하는 자문기구 이코모스(ICOMOS·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로부터 ‘등재 권고’ 유산으로 분류 판정을 받아 세계유산 등재의 가능성을 높였다. 앞서 한국의 서원은 2011년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됐다. 2015년 세계유산에 도전했으나, 이듬해 이코모스가 서원 주변 경관이 문화재 구역에 포함되지 않았고 연속유산 연계성에 대한 설명이 충분하지 않다며 ‘반려’(Defer) 판정을 했다. 이후 문화재청은 등재 신청을 자진 철회한 후 국내외 전문가 의견을 종합하고 비교 연구를 보완하고 연속유산 논리를 강화한 신청서를 작성해 지난해 1월 유네스코에 다시 제출했다.

“2011년 한국의 서원 등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죠. 추진단을 결성하고 2015년에는 비교연구 등 학술적 토대도 만들었습니다. 다만 유네스코가 유형문화유산의 경우 완충지역과 이격거리 등을 확보해야 한다는 조건 등이 있었는데 이를 보강하고 학술적 토양을 만드느라 지체된 것이죠. 그간 지자체가 일부 난개발된 주변을 정리하는 등 힘도 많이 썼습니다. 앞으로 문화재보호법 등 관련 규정을 통해 제대로 된 보존 정책을 마련하는 것도 남은 숙제입니다.”

이배용 이사장은 한국의 서원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오르는 역사적 순간 한복을 입고 자리를 함께한 유림의 모습도 인상적이었다고 전했다. 현장에 참석한 17인의 유림은 이날 ‘한국의 서원’이 세계유산목록에 등재가 확정된 순간 유교 제례(祭禮)에 따라 감사의 인사도 전했다. 집사자가 ‘공수’(拱手)를 외치면 손을 마주 잡는 예를 시작으로 ‘배흥’(拜興) ‘평신’(平身) 순서로 진행됐다. 유교 문화의 절제를 보여주는 유림의 모습에 3000여 참석자의 박수가 이어졌다.

“국가적으로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서원에 이어 자연유산으로 갯벌의 등재를 추진 중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이와 함께우리의 종택, 흔히 이야기하는 종가집 같은 고택도 세계문화유산의 자격이 충분하다고 봅니다. 앞으로 학술적 검토를 충분히 거쳐 도전해보는 게 또 다른 꿈이에요.”

이번 세계유산에 등재된 한국의 서원은 모두 9곳이다. 조선 첫 서원인 영주 소수서원을 비롯해 안동 도산서원과 병산서원, 경주 옥산서원, 달성 도동서원, 함양 남계서원, 정읍 무성서원, 장성 필암서원, 논산 돈암서원 등이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석굴암·불국사, 해인사 장경판전, 종묘(이상 1995년), 창덕궁, 수원 화성(이상 1997년), 경주역사유적지구, 고창·화순·강화 고인돌 유적(이상 2000년),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2007년), 조선왕릉(2009년), 한국의 역사마을: 하회와 양동(2010년), 남한산성(2014년), 백제역사유적지구(2015년), 산사,한국의 산지승원(2018년)을 포함해 세계유산 14건을 보유하게 됐다. 이 가운데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만 자연유산이고, 나머지는 모두 문화유산이다.

북한에 있는 고구려 고분군(2004년), 개성역사유적지구(2013년), 그리고 중국 동북지방 일대 고대 고구려 왕국 수도와 묘지(2004년)를 합치면 한민족 관련 세계유산은 17건에 달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