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넘기는 전통주산업법 개정…막걸리 업계 깊어지는 '한숨'

by김범준 기자
2022.12.23 05:30:00

"원소주는 온·오프라인서 기세등등한데"…수입 쌀로 막걸리 빚으면 전통주 아냐
실정 맞게 전통주 기준 재정립 목소리 커져
정부, 전통주산업법 개정안 추진하지만 답보
쌀 농가 반발·WTO 위배 소지 등 변수 많아

[이데일리 김범준 기자] 원소주 히트로 점화된 전통주 기준 논란이 장기화하고 있다. 정부는 지난 10월까지 ‘전통주 등의 산업진흥에 관한 법률’(이하 전통주산업법) 개정을 추진했지만 쌀을 생산하는 지역농가의 반발과 정치권 논리까지 더해지면서 해를 넘길 전망이다.

지난 6월 3일 서울 강남구 aT센터에서 열린 ‘2022 K-농산어촌 한마당’에서 다양한 막걸리를 전시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22일 정부와 주류업계에 따르면 정부는 막걸리와 청주 등을 전통주로 지정하고 기존 전통주 범위에 속해 혼용됐던 지역특산주를 분리하는 것을 골자로 한 전통주산업법 개정안을 추진할 예정이다.

국내 막걸리 시장 규모도 커지고 해외 수출도 늘고 있지만 관련 제도가 후진적이라는 판단에서다. 실제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에 따르면 2016년 이전까지 3000억원대에 그쳤던 국내 막걸리 시장 규모(국세청 출고가 기준)는 2019년 4500억원, 2021년 5000억원대로 성장했다. 관세청에 따르면 지난해 막걸리 연간 수출액은 1570만2000달러(약 207억원)로 전년보다 약 28% 증가하는 등 해외 시장 진출도 빠르게 늘고 있다. 올 상반기 수출액도 838만4000달러(약 111억원)로 전년 동기 대비 약 8% 늘었다.

정부는 특히 ‘국산 농산물을 써야만 전통주로 인정한다’는 조건을 뺄 계획이었다. 자유무역협정(FTA) 확대로 수입 맥주와 와인·사케 등 막걸리 대체재 가격이 낮아져서다. 막걸리 제조업체도 생산원가 및 제품판매가 안정을 위해 절반 가량이 수입 쌀을 사용하는 상황도 고려했다.

(그래픽=김일환 기자)
(그래픽=김일환 기자)
현재 전통주산업법에 따르면 전통주는 국가지정 장인 또는 식품 명인이 제조한 ‘민속주’나 농업법인이 생산하고 지역농산물을 주원료로 만든 ‘지역특산주’만 해당한다. 반면 통상 전통주로 생각하는 막걸리도 수입산 쌀을 사용하거나 일반 주류제조사가 생산한 막걸리는 전통주에 포함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장수막걸리, 국순당 막걸리, 지평 막걸리 등이 대표적이다.

반면 외국인이 농업법인을 만들어 국산 포도와 사과 등을 가지고 외국 주종인 와인(포도주)과 애플사이더(사과주), 진(서양식 증류주) 등을 생산하면 지역특산주로서 오히려 전통주로 인정받는다. 전통주에 포함되면 전통주산업법과 주세법 등 관련 법령에 따라 일반 주류는 금지된 온라인 유통망을 통한 전자·통신 판매가 가능하다. 또 주세 50% 감면 혜택도 받는다.

미국 국적의 가수 박재범(제이팍)이 강원 원주에 농업법인 원스피리츠를 설립하고 올 초 선보인 이래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증류주 ‘원소주’나 미국인 브랜든 힐이 미국에서 먼저 출시하고 지난 2020년 충북 충주에 농업법인을 설립해 국내에 들여온 ‘토끼소주’ 등이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특히 이커머스 시장이 커지면서 전통주가 국내 전통 주류제조업체에 역차별로 작용하고 있다.



주류업계 관계자는 “소위 ‘원소주 신드롬’으로 전통주 논란이 급부상했다”면서 “소비자들은 구분이 쉽지 않아 포털사이트에서 검색해 온라인 구매가 되면 전통주로 간주한다”고 지적했다.

지난 2월 25일 서울 여의도 현대백화점 더현대 서울 ‘원소주(WONSOJU)’ 출시 기념 팝업스토어에서 가수 박재범이 제품을 소개하고 있다. 박재범은 농업법인 원스피리츠를 설립하고 ‘지역특산주’ 원소주를 선보였다. (사진=원스피리츠)
이에 따라 전통주 기준을 재정립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특히 막걸리 업계에서는 제조 주체나 재료 구분 없이 전통 막걸리 빚기 주조법을 따르면 모두 전통주로 편입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남도희 한국막걸리협회 사무국장은 “과거 전통주를 보호하기 위해 전통주산업법을 만들었지만 현재와는 제도 내용이 너무 동떨어졌다”며 “막걸리는 명칭도 주조법도 고유한 전통으로 이어 온 우리 술”이라고 했다. 이어 “재료와 제조자로 구분하기보다는 전통주의 기준을 완화해 문화 보전과 한류에 따른 수출 육성 등 관련 산업이 함께 발전할 수 있는 실익을 거둘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주류업계 내 형평성 문제와 쌀값 안정화 등 국내 농가 보호, 세계무역기구(WTO) 협정 위배 여지 논란 등 복잡한 속사정이 잇따르면서 실마리가 좀처럼 풀리지 않는 상황이다.

국내 쌀 농가에서는 값싼 수입 쌀 물량이 늘고 있는데 수입쌀을 이용한 막걸리도 전통주에 포함하면 쌀 가격 하락폭이 커질 것을 우려하고 있다. 정부는 국내 쌀 생산 농가 보호를 위해 매년 일정 물량의 쌀을 구매하고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처분하지 못한 비축량이 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수입 쌀을 원재료로 활용하는 막걸리가 모두 전통주로 인정받을 경우, 값싼 수입 쌀을 쓰는 막걸리 제품 생산이 더욱 늘고 국산 쌀 소비 감소로 이어지면서 쌀값 하락을 더욱 부채질한다는 것이다. 일부 여야 의원들도 수입 쌀을 활용하는 막걸리의 전통주 편입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막걸리 업계의 주장을 관철하는 것도 문제가 따른다. 업계는 제조 주체와 재료에 관계없이 막걸리를 모두 전통주로 편입하되 대형 제조사의 경우 온라인 판매와 주세 50% 감면 등 혜택은 제외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이 방안은 WTO 협정에 위배될 가능성이 있다. 업계 한 관계자는 “같은 전통주임에도 불구하고 국산 쌀과 수입 쌀로 막걸리를 만드는 제조자 사이 차별을 두면 WTO나 관세와무역에관한일반협정(GATT) 주요 조항인 ‘내국민대우원칙’에 어긋날 수 있어 전통주산업법 개정이 더딘 상황”이라며 “정부가 국산 농산물 소비 확대와 전통주 산업 활성화를 위해 현재 과잉 생산되는 쌀을 막걸리 기업에 지원하는 방안도 고려해볼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