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눈치보느라…'IP 담보대출' 시늉만 내는 시중은행
by김정남 기자
2019.05.30 06:00:00
농협은행, 내달 IP 대출 출시 준비
5대 은행 동시 영업은 이번이 처음
기술가치 평가 어려워 판매 소극적
작년엔 산업·기업은행만 시장 형성
[이데일리 김정남 기자] 혁신성장의 마중물 차원에서 스타트업에 대한 금융지원 확대를 독려하는 현 정부의 정책에 따라 국내 은행들이 지적재산권(IP) 담보대출을 내놓고 있지만 실적은 극히 저조한 것으로 파악됐다. 당장 은행들은 금융당국 눈치보기에 급급해 상품을 내놓았지만 자산가치에 대한 평가 역량 부족 등으로 적극적인 대출에 나서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금융권은 특히 기존 동산담보 대출도 기술보다는 중장비 같은 기계류 위주가 많아 실제 활성화에 회의론마저 제기하고 있다.
29일 금융권에 따르면 NH농협은행 여신상품팀은 다음달 말 출시를 목표로 IP 담보대출 개발을 진행하고 있다. 기업의 IP를 외부평가기관의 가치평가를 통해 담보로 받고 평가금액을 기준으로 대출을 하는 식이다. IP는 특허권, 상표권, 저작권 등을 이른다. 농협은행 외에 나머지 주요 은행은 모두 관련 상품을 내놓았다. 5대 시중은행 모두 IP 담보대출을 출시한 건 올해가 처음이다.
그간 은행권의 IP 대출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금융위원회에 따르면 KB국민은행 정도만 2015년 57억원의 실적을 냈고 이듬해부터는 그마저도 없어졌다. KEB하나은행과 농협은행은 상품을 내놓은 적이 없다. IP를 담보로 한 기업대출은 산업은행과 기업은행 등 정책금융기관이 주도하는 형태였다. 2017년 통계를 보면 산업은행(841억원)과 기업은행(25억원)만 시장을 형성했다.
시중은행 한 관계자는 “과거 그나마 있던 IP 담보대출도 부동산 같은 유형자산 담보가 소진된 이후 추가로 설정하는 끼워넣기식(式)에 불과했다”고 전했다. MP3 혹은 내비게이션처럼 당시에는 혁신적으로 보이는 기술도 예상치 못한 또 다른 기술에 휩쓸려 사라지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그 가치를 적절하게 평가해 돈을 빌려주는 게 말처럼 쉽지는 않다는 토로다. 부실 가능성을 예측하기 어렵다는 것이다.은행권 흐름이 바뀐 건 올해부터다. 금융당국이 지난해 말 IP 금융 활성화 계획을 발표한 이후다. 국민은행은 윤종규 KB금융지주 회장이 의장으로 있는 그룹 차원의 혁신금융협의회 논의를 거쳐 IP 담보대출을 최근 취급하기 시작했다. 신한은행(4월), 우리은행(3월), 하나은행(4월)도 영업한지 두 달 안팎 정도다.
이와 관련 IP 대출을 가장 많이 취급하는 산은의 이동걸 회장은 “오늘날 세계는 벤처·창업기업이 나라 경제를 이끄는 신산업 생태계가 형성되고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시중은행 입장에서는 중요한 미래 먹거리 중 하나인 셈이다. 실제 미국에서 IP 담보대출 실행 건수는 2011~2016년 6년간 94만7907건으로 연평균 15만건 이상에 달했다. 중국의 연 IP 대출 규모도 10조원이 넘는다.
이지언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한국의 IP 출원은 세계적인 수준인데 반해 IP를 통한 사업화 수준은 낮다”며 “IP 사업화를 촉진하려면 IP 담보·보증·투자 등 IP 금융이 활발하게 공급돼야 하지만 국내의 경우 정책금융 의존도가 너무 높다”고 말했다. 민간금융이 활성화돼야 현실적으로 창업기업의 자금 조달이 원활해질 수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은행권에서는 볼멘소리도 부쩍 나온다. 당국이 IP 담보대출 규모를 기술금융 혁신평가에 반영하겠다는 방침을 천명하니 일단 따라가고 보자는 기류가 형성돼 있다는 것이다. 초반 대출 실적도 미미하다. 금융권에 따르면 신한은행은 IP 담보대출 출시 이후 세 건의 실적을 올렸고 우리은행도 이와 비슷한 수준으로 알려졌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건당 대출 규모는 대부분 한자릿수 수준(억원 단위)”이라고 귀뜸했다. 국민은행과 하나은행은 대출이 한 건도 실행되지 않았다. 또다른 은행 관계자는 “대출 문의가 들어오는 중소기업이 거의 없다”며 “(정부 방침에 따라) 실제 실적보다 출시 자체에 더 의미를 두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정책 상품을 내놓는게 되면 정부로부터 감사 등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점도 출시에 영향을 미쳤다는 얘기다.
한 금융권 고위인사는 “기술 등을 대출 담보로 인정해주자는 정책은 매 정권마다 되풀이 됐던 것”이라며 “금융사에 다소 생소한 데다 부실 가능성도 있는 만큼 실패 경험이 쌓이는 과정을 통해 자생적으로 시장이 형성돼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