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상토론)불법체류 중국동포들의 절규

by조선일보 기자
2003.11.20 07:10:06

"빚 갚을돈 못벌어…이대로 가면 맞아죽어요

[조선일보 제공] 외국인 불법체류자 단속 이틀째인 18일, 서울 구로구 서울조선족교회에서 단식농성 중인 중국동포 7명을 만났다. 중국동포 2300여명은 지난 14일부터 서울·경기지역 8개 교회에서 ‘단속 철회’와 ‘국적 회복’을 요구하며 단식농성 중이다. 이날 기자가 교회에 도착해 ‘난상토론에 참가할 분을 찾는다’고 안내방송을 하자, 수십명의 중국동포들이 몰려들었다. 토론에 참석하지 못한 중국동포들은 동료들에게 ‘○○문제에 대해서도 꼭 얘기해달라’고 당부하며 자리를 떴다. 모두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했다. ―다른 동료 10명과 지방에서 숨어지내다 어제부터 농성에 합류했어요. 여기에 간다고 하니까 다들 말리더군요. 단속반에 잡힐지도 모른다면서요. 그래도 난 가야 한다고 우기니까 ‘그럼 거리를 걸어다니지 말고 택시 타고 가라’며 차비를 모아 줬습니다. ―저도 농성이 있었는지 전혀 몰랐어요. (불법체류 신분이라) 꼭꼭 숨어 있었거든요. 그런데 어젯밤 뉴스를 보고 이곳을 찾았어요. 한국에서는 여러 사람이 단체로 뭉쳐서 요구하면 말을 들어주잖아요. ―그래도 한국에 우리를 돕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농성도 벌일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이런 장소가 있어서 중국동포들끼리 만나고 어려움을 토로할 수 있는 게 고마워요. ―근데 우리가 왜 ‘불법체류자’입니까? 일제시대 때 살기 어려워 중국에 잠시 건너갔다가 길이 막혀서 돌아오지 못한 겁니다. 우린 분명 한국인입니다. 우리가 중국 국적을 선택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한국 정부도 이런 사정을 참작해주길 바랍니다. ―이번에 제가 쫓겨나면 우리 가족은 일제시대 때 이어서 또 이산가족이 돼버립니다. 일제시대 때 할아버지는 생활고로 전남에서 어머니를 데리고 중국으로 건너갔어요. 그런데 광복 후 길이 막혀서 고향 친지들과 이산가족이 돼버렸죠. 그렇게 중국에서 살다 4년 전 늙으신 어머니를 모시고 왔을 때만 해도 너무나 기뻤어요. 하지만 어머니는 1세대라서 국적이 회복됐는데, 저는 결혼을 했기 때문에 떠나야 한답니다. 어머니를 봉양해야 하는데…. ―작년 월드컵 때 중국동포들이 한국이 4강에 올랐을 때 얼마나 좋아했는데요. 우리 고국이 잘돼서 말이죠. 4강에서 독일에 졌을 때는 속상해서 술을 엄청 마셨어요. 저는 이곳을 내 나라, 내 민족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 새문안교회에서 단식농성중인 불법체류중국동포들이 19오후 헌법재판소에 제출할 진술서를 작성하고 있다/ 전기병 기자 ―전 알선업소를 통해 소개받은 한국 남성과 2년 전 결혼해서 왔습니다. 남편은 제가 한국 온 다음날부터 저를 두들겨 팼어요. 의처증이었죠. 결혼 후 2년이 있어야 국적이 나오기 때문에 꾹 참았죠. 하지만 하루는 술에 취해 칼까지 드는 걸 보고 너무 무서워 파출소에 신고하고 가출을 했습니다. 얼마 후 돌아가 보니 남편이 ‘결혼사기를 당했다’며 법원에 이혼신청을 해서 받아들여진 상태였습니다. 그때가 결혼 1년9개월째였어요. 3개월만 참았으면 됐는데…. ―우리가 한국 국적을 취득만 했어도,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하진 않을 겁니다. 우리 몸에는 한국인 피가 흐릅니다. 한국인 되고 싶은 우리 마음을 제발 이해해주세요. ―저는 밀린 임금만 받으면 아내와 중국으로 돌아갈 겁니다. 다른 가족이 중국에 있거든요. 지난 5년 동안 함께 일한 동료 10명과 제가 못 받은 월급을 모두 합쳐보니 1억2500만원이에요. 저는 그 중에 6500만원을 받지 못했죠. 일을 시킬 때는 언제고 공사가 끝나니 ‘돈 없다’며 오리발이더군요. ―그렇다고 모든 한국 사람들이 나쁘다는 건 절대 아니에요. 건설현장에서 건설자재를 나르다가 잘못해서 오른쪽 발등 뼈에 금이 간 적이 있어요. 전 그래도 일해야겠다고 붕대를 감고 나갔는데, 그걸 본 소장님과 반장님들이 ‘잘못하면 불구될 수 있다’며 저를 병원으로 데려다줬어요. ―지내다보니까 좋은 사장님들이 많이 있어요. 문제는 몇몇 악덕 사장들이에요. 불법체류자가 15일까지 출국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는지 사장이 “15일 이후에 찾아오면 꼭 돈을 주겠다”는 겁니다. 제가 출국하지 않고 연락을 하니까, 그 사장이 아예 회사에 나오지도 않고 휴대전화를 꺼놓았어요. ▲ 18일 오후 서울조선족 교회에서 난상토론을 벌이고 있는 중국동포들. 왼쪽부터 이재덕 이송호 이철수 이철민 이정순 최화자 김인숙씨주완중기자 =―우리 보고 한국에 돈만 벌러 왔다고 욕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하지만 우리는 소위 다들 싫어하는 3D업종에서 일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점은 인정해주셔야 합니다. 외국인 불법체류자를 내쫓는다고 하니까 오히려 중소규모 공단 사장님들이 더 반대하잖아요. ―제 아버지 고향은 전라도이고, 어머니는 강원도 분이셨어요. 중국에서는 한국 사람이라고 몹시 멸시를 받았어요. 부모님한테 ‘넌 꼭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을 어릴 적부터 듣고 한국에 왔는데, 먼 외국에서 온 이방인 대접을 받아 너무 섭섭했어요. ―제조업 종사자는 당분간 단속을 유예한다고 했잖아요. 그러면 서비스업, 건설현장, 유흥업소 등에서 일하는 불법체류자를 먼저 잡겠다는 건데, 우리 중국동포들이 대부분 취업해 있는 곳이 바로 이 세 분야입니다. 정부가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지 않을 텐데…. ―공무원들이 너무 무서워요. 문제가 생겨서 관공서를 찾아가도 얘기를 제대로 들어주려고 하지 않아요. 우리를 대할 때 공무원들의 얼굴이 왜 그렇게 무섭게 변하는지 모르겠어요.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같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아요. ―중국동포들 사이에는 이제 차별문제들을 한국 법정에 가지고 가면 안 되고 유엔에 상정해야 한다고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농성하고 있는 사람 대부분이 돈을 벌지 못해 못 가고 있는 겁니다. 한국에 오기 위해서 보통 2000만~3000만원의 빚을 지고 오는데, 그냥 돌아가면 중국 가서 빚을 못 갚아 맞아죽어요. 그러니 다들 못 떠나겠다는 거죠. ―그동안 우리가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좋은 사업주에 대해 말하지 않고 악덕 사장에 대해서만 너무 강조해온 면도 있어요. 솔직히 양심적인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우리도 그동안 저축하며 잘살 수 있었던 점을 인정합니다. ―같은 중국동포끼리 눈살을 찌푸리게 한 일도 있었어요. 다른 데서 돈을 조금 더 준다며 일하던 공사현장에서 갑자기 사라지는 중국동포들을 보면서 참 아쉬웠어요. 신뢰 문제인데 자신의 일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떠나면 앞으로 건설현장에서 우리 중국동포들을 쓰겠어요? ―구로동에 살았는데 밤마다 술 마시고 싸우는 동료들이 많았어요. 경기도 안산에서는 중국동포 조폭이 있다는 말도 들었죠. 이런 말 들을 때마다 우리 중국동포가 한국 사회에 ‘어두운 사람들’이라는 이미지로 남을까봐 걱정이 많이 됐어요. ―요즘 한국 기업들이 중국에 진출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중국동포들이 바로 중국 진출의 가교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한국 정부도, 한국인도 우리 중국동포들을 잘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난상토론 참석자 -김인숙(여·65) 중국 선양시, 한국체류 3년, 국제결혼으로 입국 후 이혼 -이송호(55) 중국 헤이룽장성, 한국체류 11년 -이재덕(53) 중국 헤이룽장성, 한국체류 4년, 공장·건설현장에서 일함. -이정순(여·55) 중국 헤이룽장성, 한국체류 5년, 식당 종업원으로 일함. -이철민(62) 중국 옌볜, 한국체류 10년, 건설현장 노동자·빌딩 경비원으로 일함. -이철수(47) 중국 헤이룽장성, 한국체류 8년, 건설현장에서 일함. -최화자(여·51) 중국 헤이룽장성, 한국체류 8년, 식당 종업원으로 일함. (진행·정리=김봉기기자 knight@chos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