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리스크보다 무서운 통상임금[생생확대경]
by정병묵 기자
2024.12.26 06:00:00
대법원 전원합의체, 통상임금 판결 후 산업계 대혼란
11년 넘게 이어진 체계 뒤집는 것은 본질적 해결책 아냐
''3高'' ''트럼프 리스크''에 더해 인건비 리스크가 현실로
법률상 통상임금 범위를 명확히 규정하는 조치 시급
[이데일리 정병묵 기자] 고금리·고물가·고환율 등 이른바 ‘3고(高) 현상’ 장기화에 신음하는 산업계에 또 다른 큰 리스크가 발생했다. 지난 19일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재직 여부나 근무 일수 등을 지급 조건으로 설정한 ‘조건부 상여금’도 통상임금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판결했기 때문이다. 2013년 재직자, 최소 근무 일수 조건이 있으면 정기상여금도 통상임금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판결을 전면 뒤집은 것이다. 예기치 못한 인건비 리스크가 현실화하면서 새해 극도의 혼란이 불가피해졌다.
| 현대차 울산공장 수출부두 전경. 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련 없음(사진=현대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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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계에서는 통상임금 기준을 재정립하자는 움직임이 벌써부터 일고 있다. 지난 23일 전국금속노동조합 현대자동차지부는 “공정한 임금체계를 확립하는 첫 단계로서 지난 19일 통상임금 재정립에 따른 협의를 요청했다”면서 “사측은 지부의 통상임금 확대를 위한 노력에 대해 성실히 교섭에 임하라”고 강조했다. 법률 자문도 진행할 방침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다른 기업들로도 일파만파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상당수 기업들이 그간 통상임금을 가지고 ‘꼼수’를 벌였기에 이번 판결이 적절하다는 반응도 있다. 초과근로수당을 아끼기 위해 월 통상임금이 최저임금보다 낮은 기형적 체계가 있었고, 임금항목 대부분에 재직 조건이나 근무일수 조건을 붙여 최저임금에 위반되지 않으면서도 통상임금은 낮추는 수법을 쓴 곳도 많았다는 것이다.
일부 악용 사례가 있었지만 11년 넘게 이어진 체계를 하루 아침에 뒤집은 것은 본질적 해결책과 거리가 멀어 보인다. 조건부 상여금의 통상임금 산입에 따라 추가 인건비만 7조원이 더 들어갈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는 가운데, 대기업뿐만 아니라 중견·중소기업까지 당장의 막대한 인건비 지출이 현실화했다. “트럼프 당선보다 통상임금이 더 무섭다”는 얘기가 재계에서 나오는 게 과언이 아니다.
이번 판결에 따라 근로자의 실질 급여가 오를 것으로 예상되지만 큰 기업 일부에게만 혜택이 돌아갈 가능성이 크다는 점도 문제다. 한국경영자총협회의 분석에 따르면, 조건부 상여금이 통상임금에 산입될 시, 평균 인당 연간 임금 총액이 300인 이상 사업장의 경우 361만6000원 증가한다. 반면, 30~299인 사업장의 경우 160만6000원, 29인 이하 사업장은 20만8000원 증가에 그칠 것으로 예상된다.
본질적인 문제는 근로기준법상 통상임금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송을 통한 대법원 판례를 중심으로 논의가 발전해올 수밖에 없었고, 십수년마다 혼란을 재발하고 있는 것이다. 오죽하면 조희대 대법원장이 지난 4월 “모든 회사의 모든 임금 항목마다 전원합의체로 와야 하는 이런 나라가 어디 있느냐”며 “통상임금에 대한 입법 조치가 급선무”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전쟁, 환율, 유가, 관세 등 우리 경제를 좌우하는 외부 요인은 너무나도 많다. 이는 우리가 어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지만 급여 리스크는 우리가 직접 해결 불가능한 게 아니다. 법원의 판단에 맡겨 십수년 후 또 다른 경영 리스크와 혼란을 초래할 게 아니라, 근로기준법상 통상임금의 명확한 정의와 요건이 무엇인지 정립하는 것이 정부·정치권이 우선 해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