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무르익은 가을 새벽녘, 호수가 준 고요한 안식에 빠지다
by강경록 기자
2021.10.29 04:30:00
가을 내려앉은 경남 밀양
봄풍경 못지 않은 위양지의 가을 풍경
용의 이야기 얽힌 만어사의 너덜겅
[이데일리 강경록 기자] 새벽 호숫가로 내려간다. 수풀처럼 우거진 어둠을 헤치며, 저 멀리 아스라한 물안개가 잔물살처럼 밀려온다. 바람 한점 없는 수면 위로 무수히 피어오르며 한데 모여 일렁인다. 한마리 외로운 백조가 잔잔한 물 위에 이리저리 쉼없이 오가는 듯하다. 어느샌가 물안개는 호수를 장악하고, 산허리를 휘돌아 골골이 소문처럼 번져나간다. 소리소문없이 장면을 바꿔가는 가을 호수의 아침 공연이다. 공연은 햇살이 산등성이를 비출 때까지 이어진다. 물안개 공연은 아무 때나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운이 따라야한다. 물안개는 물과 대기의 온도 차이에 의해 생기는 현상. 물 위의 습도 높은 공기가 찬 공기와 만나면 기온이 떨어져 미세한 물방울로 응결된다. 이 물방울들이 떠오르며 빛의 산란작용에 의해 하얀 구름처럼 보이는 것이 바로 물안개다.
가을 새벽 공연을 만날 수 있는 곳은 경남 밀양의 위양지다. 위양지는 밀양 시내를 보호하듯이 감싸고 있는 밀양의 진산인 ‘화학산’ 아래 자리한 연못이다. 둘레 166m에 불과한 저수지. 이 저수지에 5개의 섬과 휘휘 늘어진 버드나무, 그리고 이팝나무 등이 어우러지며 빼어난 풍경을 그려낸다. 일교차가 커지는 가을의 위양지. 특히 바람 없는 새벽과 아침나절에는 잔잔한 물 위로 물안개가 깔리고, 주변 풍경이 모두 담길 때면 신선의 세계를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위양지는 신라 때 축조된 저수지다. 위양지 주차장 앞 현판에는 “선량한 백성들을 위해 축조됐다”라는 설명이 쓰여 있다. 원래 논에 물을 대던 수리 저수지였지만, 인근에 거대한 가산저수지가 들어서면서 역할을 빼앗겼다. 대신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그 쓸모가 바뀐 셈이다.
위양지의 명성은 아름다운 봄 풍경에서 시작됐다. 위양지 봄 풍경의 9할은 이팝나무다.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팝나무를 만날 수 있다. 봄이면 위양지 둘레의 오래된 이팝나무들에서 하얀 쌀밥과 같은 아름다운 이팝 꽃이 만개하는데, 이팝나무가 고요한 수면에 거울처럼 비치는 모습은 가히 황홀하다는 표현도 아까울 정도다. 그중 단연 으뜸은 연못에 떠있는 정자 담 너머다. 1900년에 지어진 안동 권씨 문중 소유의 정자, ‘완재정’이 그 주인공. 연못에 떠 있는 섬 하나에 지었다. 당시에는 배로 드나들었다는데, 지금은 정자로 건너가는 다리가 놓였다. 정자 담장을 끼고 있는 이팝나무가 꽃을 피우면 순백의 꽃들이 세상을 환하게 한다. 매화는 3월에 봄의 기미를 처음 알리고, 벚꽃은 4월에 봄의 절정을 보여준다. 5월에 봄의 깊이를 더하는 건 단연 이팝꽃. 순백의 이팝꽃은 화려하기가 벚꽃 못지않다. 이 모습을 담으려고 전국의 사진작가들이 모여든다.
위양지에서 오랫동안 사진을 찍어온 사람들은 봄보다 가을의 풍경에 손을 들어준다. 저수지에는 겨울을 준비하는 청둥오리들이 한가롭게 물위를 떠돌며 산책을 즐기고 있고, 그 물속으로는 형형색색 옷을 갈아입은 산과 들이 그대로 담겨 있다. 호수 주위의 수백살 된 이팝나무와 느티나무는 물속에서 꿈꾸듯이 고요하다. 여기에 물에 투영된 산그림자는 마치 한 폭의 산수화를 보듯이 아름답다. 가을 이른 새벽마다 이 빼어난 풍경을 담으려는 사진 애호가들이 곳곳에 자리잡는 이유다. 특히 아침에 피어오르는 물안개에 젖은 저수지는 몽환적인 분위기까지 자아내 이색적이면서도 경이롭다.
밀양의 어원은 ‘용의 땅’이다. 정확히는 ‘용의 벌판’이다. 밀양은 용을 뜻하는 옛말인 ‘미르’란 우리말의 발음을 한자로 쓰면서 ‘밀’(密) 자를 따왔고, 벌판을 뜻하는 벌이 ‘볕’(陽)으로 쓰이면서 만들어진 이름이다. 그래서일까. 밀양에는 용에 얽힌 이야기들이 많다. 그중 눈길을 끄는 것이 삼랑진에 있는 ‘만어사’에 대한 전설이다.
만어사는 만어산 턱밑에 자리하고 있다. 그 마당 아래 비탈에 돌이 무더져 흩어져 있는 비탈, ‘너덜겅’이 펼쳐져 있다. 커다란 바위들이 절집 옆의 비탈면에 가득하다. 이 광활한 모습에 그 앞에 서면 누구든 탄성을 지른다. 그게 무슨 볼거리가 되나 싶지만, 시커먼 돌들이 주르르 흘러내린 형상은 입을 떡 벌어지게 한다.
이 너덜겅에 곁들여진 전설도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전설의 내용은 이렇다. 만어산에 살던 독을 품은 용이 부처의 설법으로 제자가 되자, 소문을 들은 용왕의 아들이 자신도 제자가 되길 소원해 수만 마리의 물고기 부하를 이끌고 부처를 찾아 제자가 되길 간청했다. 그때 용왕의 아들을 따라온 물고기들이 만어사에 당도하자 돌로 변했다. 그게 바로 너덜겅의 바위다. 돌이 된 수많은 고기떼의 의미를 살려 만어사라 부르게 됐다는 이야기다.
이 너덜겅은 ‘얼음골’, ‘표충비’와 함께 밀양의 3대 신비로 꼽힌다. 미륵전 아래 첩첩이 깔린 돌너덜은 고기들이 변해서 된 것이라 하여 만어석(萬魚石) 또는 어산불영(魚山佛影)이라 부른다. 신기한 건 너덜겅의 돌들이 서로 두드리면 깊고 맑은 종소리를 낸다는 것. 만어사의 돌들이 ‘종과 경쇠 소리를 낸다’는 얘기는 삼국유사에도 기록돼 있다. 만어사를 찾은 이들은 너나없이 너덜겅의 돌을 두드려 보는데, 모든 돌이 다 맑은 소리를 내는 건 아니다. 바위 표면에 돌이 부서진 흰 가루가 묻어 있다면 그게 곧 여러 사람이 두드려본 자리. 거길 두드리면 영락없이 맑은 종소리가 난다. 하나의 돌도 두드리는 자리에 따라 소리가 다르다. 너덜겅 위에 세운 전각 미륵전 마당의 커다란 바위에서는 서로 다른 일곱 가지 소리가 났다.
만어사 미륵전에는 불상 대신 커다란 돌이 있다. 부처의 불상이 앉았을 법한 좌대에는 커다란 자연석 하나가 덩그러니 자리를 잡고 있다. 붉은빛이 감도는 높이 5m의 이 자연석은 ‘미륵바위’ 또는 ‘미륵불상’이라고 불린다.
혹자는 전설 속 동해 용왕의 아들이 변한 돌이라고도 하고, 자연석 표면에 붉은색이 감도는 부분이 가사(袈裟)처럼 보인다고도 한다. 주지스님은 잉어를 닮았다거나 물고기가 입질하는 모양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고 전했다.
△밀양 여행의 필수 코스 중 하나는 영남루다. 양쪽에 침류당과 능파당이란 건물을 거느린 웅장한 규모의 영남루는 진주 남강의 촉석루, 평양 대동강의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누각으로 꼽힌다. 누각은 규모부터 현판의 글씨까지 시원시원하다. 영남루는 밀양강 건너편에서 보는 야경이 특히 아름답다. 조명 켜진 영남루를 바라보면서 천변을 따라 느릿느릿 걷는 것만으로도 봄밤의 정취를 한껏 느낄 수 있다.
△고택 여행의 시작점인 금시당, 백곡재는 450년된 은행나무가 유명하다. 조선 명종때 이광진 선생이 낙행해 지은 별서 건물로, 제자들을 교육하기 위해 1566년에 지은 건물이다. 건물 이름은 선생의 호를 땄다. 좌우로 산을 끼고 바로 앞으로는 밀양강을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했다.
△‘기회송림유원지’는 영화 ‘밀양’의 촬영지로 유명해지면서 전국에서 관광객들이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150여 년 전 남기리 기회마을 주민들이 북천강의 범람을 막기 위해 조성한 폭 200m, 길이 1500m의 방수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