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수효과 기대마라 '내 일자리'에 그런 건 없다
by오현주 기자
2019.07.10 00:45:00
AI·로봇이 중산층 일자리 빼앗아
최상·최하 직종만 남는 ''양극화''
일자리 수보단 ''질''을 지켜내야
▲일자리의 미래|엘렌 러펠 셸|488쪽|예문아카이브
| 미국 인튜이티브 서지컬사가 개발한 ‘다빈치수술시스템’. 사람 손보다 정교해 섬세한 외과수술을 할 수 있다. 저자 엘렌 러펠 셸은 AI와 로봇의 발달로 중산층 일자리가 사라질 거라고 우려했다. 그렇다고 의사·변호사 등 ‘고도의 전문직’이 오래 살아남을 거란 믿음도 착각이라고 꼬집는다. 복잡할뿐더러 고임금까지 지불해야 하니 기계로 대체할 수만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는 거다(사진=뉴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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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머리를 비워야 답이 보이는 문제 하나. 다음 중 기계로 대체할 위협을 받는 ‘일자리’는 어느 것일까. ① 패스트푸드 식당에서 버거에 들어갈 패티를 뒤집는 일, ② 스포츠카를 디자인하는 일.
정답은? ②번이란다. 이유가 대단하다. ‘패티를 뒤집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쉬운 작업이기 때문에’다. 바로 이 점이 이미 오래전 실용화할 수 있었던 기계도입을 그다지 서두르지 않은 까닭이란다. 이런 일에 고임금을 받겠다는 사람도 없으니까. 그렇다면 스포츠카 디자인은 왜? 이 경우는 좀 다르다고 했다. 복잡할뿐더러 높은 임금까지 지불해야 하는 직종이 아닌가. 기계로 대체할 수만 있다면 마다할 핑계가 없다는 거다. 비용은 금세 회수할 테니. 비단 스포츠카 디자이너뿐일까. 심장수술하는 의사, 이혼소송하는 변호사, 투자정보를 파는 금융전문가 모두 비슷한 처지다.
거 봐라. 머리를 비워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 철석같이 믿었던 상식에 금 가는 소리가 들리니. 보통 사람의 생각은 그랬다. 주방보조·청소원·주유원 등 단순직종이 기계나 로봇의 위협을 가장 심각하게 받는다고 말이다. 사서나 기자 등도 불안하긴 했다. 지식이 필요하지만 반복일을 하는, 한때는 고임금을 줘야 했던 직종 말이다. 대신 ‘창의적 분야’ ‘고도의 전문직’은 오래도록 인간의 영역에 남아 있으려니 믿었더랬다. 회계사·변호사·의사·외환딜러 등등 말이다. 이로써 당장 4차 산업혁명시대 일자리를 대하는 교훈이 바뀐다. “임금이 높을수록 자동화되기 쉽다!” 혹은 “일자리를 지키는 데 영역구분은 없다!”
강력한 놈이 나타났다. ‘일자리’다. 자유가 좀 무시되고 정의가 좀 빠져도 일자리를 늘린다면 그럭저럭 용서가 된다. 분야를 따지지도 않는다. 대선·총선 할 것 없이 선거유세에는 빠짐없이 등장하고, 정부정책에도 0순위다. 산업계도 마찬가지. 경영진이 갑질을 해대도 일자리를 내놓겠다고 하면 ‘착한 기업’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 국경을 넘어도 사정은 다를 게 없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대선 캠페인 당시 내놓은 ‘2500만개 일자리’ 공약은 가히 놀라웠다. ‘진정한 일자리’를 미국 영토에 되찾겠다고 부르짖었더랬다. “나는 신이 만든 가장 위대한 일자리 창출자가 될 것입니다!”
△“평균은 끝났고… 중산층 일자리는 사라진다”
그런데 여기 세계가 그토록 바라마지 않는 일자리를 다른 시선에서 보는 이가 있다. 지금 따질 게 ‘일자리 수’여서만은 안 된다는 거다. 중산층의 일자리가 사라지는 게 더 시급한 문제라는 거다. 그러곤 중산층 일자리를 없애는 주범으로 ‘디지털 경제’를 소환한다. 일자리를 없애는 것도 문제지만, 모든 일자리를 하향평준화 시키기 때문에 더 심각하단다. 왜? 디지털 경제는 저임금을 담보하니까. 이는 곧 불평등이 심화된다는 얘기고, 중산층 삶 자체가 위기란 얘기니까. ‘최상위 일부의 고급 일자리’와 ‘중산층 이하 대부분의 저급 일자리’로 극명하게 갈릴 판이니까.
이 주장은 미국 보스턴대 교수이자 과학·환경·소비자분야 저널리스트로 활약하는 저자에게서 나왔다. 우선은 로봇과 인공지능(AI)의 출현에 눈을 돌린다. 중산층 일자리 소멸을 따지기에 딱 좋은 상황이란 거다. 요즘 화두가 된, 기계에게 뺏긴 내 일자리를 말하는 거다. 하지만 감춰둔 칼은 이내 다른 곳을 향한다. ‘일자리의 질’과 ‘일자리의 양극화’다.
가령 최근 통계에 따르면 미국 노동자의 절반쯤이 연간 3만달러(약 3500만원)에 못 미치는 소득을 올리고 있단다. 대신 달랑 1600여명이 미국민의 90%가 가진 재산을 모두 합친 부를 소유하고 있고. 저자는 이와 유사한 통계·사례를 들어 여기저기서 삐져나오는 “평균은 끝났다”란 외침에 주목했다. 이는 더 이상 중산층은 없다는 소리고, ‘정상에 서지 못하면 바닥으로 추락한다’의 다른 말이 아닌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일자리 위협은 ‘인간’에게서도 가해진다. 이런 예도 있다. 미국에서 ‘최저시급 15달러(약 1만 5000원)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노동환경을 통째 개선하겠다고 움직이기 시작했단다. 그러자 고용주들이 나섰다.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당신들을 기계로 대체할 거야.” 단순 협박도 아닌 듯하다. 늘 그렇게 해왔던 이들이라니.
△일자리만 늘어나면 다 해결되나
저자가 펴둔 돗자리는 미국이 배경이다. 그럼에도 수치와 명칭만 바꿔 넣는다면 별 문제가 없을 ‘한국 상황’이 수시로 보인다. 가장 결정적인 변수는 실업률이다. 실업률이 떨어졌다는 보도 한 마디가 일단 모두에게 안도감을 주니까. 하지만 저자는 여기서도 경계를 거두지 않는다. 문제는 일자리의 양이 아니라 질이라니까. 이와 관련해 이제껏 믿어왔던 명제에 대한 수정이 불가피하단 의견을 붙였다. ‘성장의 핵심동력이 효율성 향상에 있다’는 가정. 과거에는 대단했다. 하루종일 용광로에 석탄 넣는 일만 해도, 매일 옷감을 똑같이 재단하는 일을 해도 효율만 높일 수 있다면 고민할 게 없었으니. 단순노동의 논리가 그랬다. 의사는 생명을 구했느냐보다 진료한 환자 수로 평가받고, 농부는 재배한 작물의 영양·맛보단 가격으로 평가받고. 하지만 이 ‘양적’ 논리의 중대결함이 이젠 보이지 않느냐는 거다.
500쪽에 달하는 장구한 ‘일자리론’에 장밋빛은 거의 없다. 회색톤의 칙칙함뿐이다. 어찌 보면 가장 현실적이긴 하다. 버둥대지 말고 차라리 깔끔히 인정한 뒤 판을 다시 짜는 게 낫다는 거니. 일자리는 줄어들 거고, 직업을 향한 꿈은 버리는 게 좋다. ‘낙수효과’(고소득층 소득증대가 소비·투자 확대로 이어져 저소득층 소득을 증가시키는 효과)는 있을 거라고? 천만에. 일자리 해법에 그런 건 없다. 기대도 마라.
그러니 누가 혼자 짊어지고 나설 일이 아니란다. 그러면 어떻게? 일자리 문제에 관한 한 모두가 나서야 한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정부·교육계·노동자·시민들이 일자리 미래의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했다. 여기에 근로소득세 개편, 기본소득제도 확립, 근로시간 단축 등 사회·제도적 합의는 덤. 그러곤 이 주장을 다지기 위해 2500년 전 아테네의 정치가 페리클레스를 불러냈다. 지금 처한 일자리 고충에 긍정코드를 심기엔 턱없이 부족하지만. “우리의 임무는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현명하게 준비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