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에 피해 주지 않을 것"…정부 상법개정 후퇴하나

by김정남 기자
2024.09.23 05:30:02

[스페셜리포트]상법 개정안 논란③
尹, 연초 추진 의지 밝혔지만
각계 우려에 유보적 태도 전환
재계, 정부 발표 예의주시

[이데일리 김정남 기자] “기업 이사의 충실의무에 ‘회사’ 외에 ‘주주’를 더하는 입법은 세계 주요국에서 찾아볼 수 없다. 왜 한국만 이러는지 이해할 수 없다.”

재계의 한 고위인사는 22일 이데일리와 통화에서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상법상 회사에 대한 이사의 충실의무에 주주를 더해야 한다는 상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쏟아지고 있는데 대해 “현행법 체계를 뒤흔들고 경영 일선의 대혼란을 초래할 게 뻔하다”며 이렇게 말했다.

현행법상 이사가 회사 외에 별도로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를 진다고 보기 어렵다는 게 재계의 시각이다. 상법상 이사는 주주총회 결의로 회사가 임용한 회사의 ‘대리인’(제382조 제2항)이다. 이는 민법상 위임의 법리(민법 제680조)와 대리인의 선관 의무(선량한 관리자의 의무·민법 제681조)를 적용한 것이다. 이사의 보수 역시 정관과 주총 결의로 회사가 지급(상법 제388조)한다. 민법과 상법 체계상 이사의 충실의무는 위임 계약을 맺은 회사에 한정된다는 것이다.

법 체계 훼손 외에 다양한 현실적인 경영상 혼란도 문제다. 이를테면 소액주주는 배당 확대 등을 요구할 유인이 큰 데, 지배주주는 장기 투자 등을 이유로 이익을 회사에 유보할 것을 주장할 수 있다. 이때 이같은 주주간 이해충돌을 이사가 합치시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또 다른 재계 관계자는 “이사는 다양한 주주들로부터 충실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며 소송을 당할 수 있다”며 “회사 입장에서는 비용이 커지고, 소비자 입장에서는 제품·서비스 가격이 비싸지는 것”이라고 했다.

이 때문에 해외 주요국의 사례 자체를 찾기 어렵다. 한경협이 권재열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에게 의뢰한 연구용역을 보면, 미국의 현행 모범회사법은 이사가 ‘회사의 이익’으로 직무를 수행해야 한다고 규정돼 있다. 영국 회사법 역시 이사는 ‘회사의 최선의 이익’이라고 생각하는 바에 따라 선의로 행위해야 한다고 했다. 캐나다의 현행 회사법의 경우 이사가 ‘회사의 이익’을 위해 행동할 의무를 규정해 놓았다. 독일, 일본, 호주 등도 상황은 비슷하다.

권 교수는 “주주의 비례적인 이익 보장은 현실화할 수 없는 이상적인 관념에 불과하다”며 “이를 상법에서 강제할 경우 회사의 장기적인 이익을 위한 경영 판단을 지연시켜 기업 경쟁력을 떨어뜨릴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래픽=문승용 기자)


거대 야권을 중심으로 상법 개정안이 쏟아져 나오고 이에 재계가 강하게 반발하는 와중에 가장 중요한 관건은 정부의 입장이 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 정부는 명확한 입장을 정해놓지 않았다. 당초만 해도 증시 저평가 논란이 이어지고 이를 해소하는 방안으로 밸류업을 추진하면서, 상법 개정에 불이 붙는 듯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월 2일 증시 개장식에 참석해 “이사회가 의사결정 과정에서 소액주주의 이익을 책임있게 반영할 수 있도록 하는 상법 개정을 추진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이후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수차례 상법 개정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그러나 재계, 학계 등을 중심으로 반대 여론이 거세지면서 정부는 다소 유보적인 태도로 바뀌었다. 한덕수 국무총리가 지난 11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기업 경영 환경을 위축시킨다는 우려가 있어서 여러 의견을 듣고 있다”며 확답을 보류한 게 대표적이다. 상법 개정과 관련한 주무부처는 법무부인데, 법무부 역시 명확한 견해는 밝히지 않아 왔다.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주주의 이익을 보호하면서 기업들의 경영에 불필요한 피해를 주지 않을 것”이라며 “조만간 (정부 입장에 대해) 설명을 드릴 것”이라고 했다.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이에 대한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는 가운데 정부가 곧 내놓을 발표가 여권의 입장으로 굳어질 흐름인 것이다. 재계 한 관계자는 “상법 개정을 둘러싼 논란이 크다 보니 정부 안에서도 부정적으로 다소 기우는 것으로 안다”며 “정부 발표를 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