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십·효심…이순신 장군이 '난중일기'에 남긴 것[알면 쉬운 문화재]

by이윤정 기자
2023.06.10 07:00:00

1592~1598년 친필로 쓴 7권
2013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직무 태만 부하 엄벌·규칙 잘지키면 보상
"어머니 생각에 밤 지새워"…아들 잃은 슬픔도

우리 ‘문화재’에는 민족의 역사와 뿌리가 담겨있습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도 있듯이 수천, 수백년을 이어져 내려온 문화재는 우리 후손들이 잘 가꾸고 보존해 나가야 할 소중한 유산이죠. 문화재는 어렵고 고루한 것이 아닙니다. 문화재에 얽힌 재밌는 이야기, 쉽고 친근하게 배울 수 있는 문화재 이야기를 전합니다.<편집자주>

[이데일리 이윤정 기자]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장군을 꼽으라면 아마도 이순신 장군이 아닐까 싶습니다. 단 12척의 배를 이끌고 330여척에 달하는 왜군의 배를 무찌른 ‘명량대첩’은 역사에 남은 위대한 전쟁이었죠. 이 싸움에서 이순신은 유리병의 목처럼 좁아지는 해로 울돌목(명량)의 물살을 이용해 수적 열세를 이겨냈어요. 그는 두려워하는 병사들을 향해 “살고자 하면 필이 죽을 것이고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라는 명언을 남겼죠.

이같은 공적 덕분에 이순신은 존망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해낸 영웅으로 각인돼 있습니다. 이순신은 7년간에 걸친 임진왜란의 전사를 일기로 남겼어요. 바로 유명한 ‘난중일기’인데요.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친필로 쓴 일기 7권을 묶은 서적으로 국보로 지정돼 있어요. 2013년 6월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며 세계적인 가치를 인정받았습니다. 그가 남긴 ‘난중일기’에는 어떤 내용들이 담겨있을까요.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사진=문화재청).
이순신은 치열한 격전이 있던 날도 일기를 거르는 법이 없었어요. 노량해전에서 전사하기 직전까지도 일기를 적었죠. ‘난중일기’를 통해 임진왜란의 구체적인 경과와 전술, 당시의 시대상 등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사료예요. 또한 어머니에 대한 효심, 대표적인 라이벌인 원균에 대한 솔직한 감정도 적혀있어 인간적인 면모도 엿볼 수 있어요.

먼저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사용했던 이순신의 리더십을 짐작할 수 있는데요. 일기에는 직무에 태만하거나 군영을 이탈한 부하들을 엄벌했다는 내용이 상당수 담겨있어요. 전시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철저한 ‘원칙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순신의 고충을 보여주는 대목이죠. 반면 규칙을 잘 지키는자에겐 최대한 보상을 해주었어요.

이순신의 시조 중 가장 유명한 ‘한산도가’도 기록돼 있어요. 한산만을 바라보며 나랏일을 근심하고 염려하는 마음을 담았죠.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큰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한 곡조의 피리 소리)는 나의 애를 끊나니”

갈등을 겪었던 무신 원균에 대한 격한 감정도 숨기지 않았는데요. 원균을 120여 차례나 언급하며 떳떳하지 못하고 치졸한 모습을 비난했어요. “원균의 말은 극히 흉측하고 거짓되어 무어라 형언할수 없다”라고 폭로하거나 “원균의 술주정에 배 안의 모든 장병들이 놀라고 분개하니 고약스러움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고 적었어요.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다하지 못한 효에 대한 괴로움도 절절하게 적혀 있는데요. “80세가 되신 병드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오늘이 어머니 생신이지만 적을 토벌하는 일 때문에, 가서 오래 사시기를 축수하는 술잔을 올리지 못하니 평생의 한이다” 등 심경을 적었어요.

이순신은 임진왜란 중에 아들의 죽음까지 겪어야 했어요. 1597년 10월 14일에는 셋째 아들 면의 전사 소식이 기록돼 있어요. “저녁에 어떤 사람이 와서 집안 편지를 전하였는데 봉함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떨리고 정신이 혼란해졌다. 겉봉을 뜯고 영(이순신의 아들)의 글씨를 보니 거죽에 ‘통곡’ 두 글자가 씌어 있어 면의 전사를 알고 간담이 떨어져서 목을 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인자하지 못하시는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것 같다”라고 비통한 심경을 썼어요.

난중일기의 또 다른 가치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날씨 연구 자료’라는 사실이에요. 실제 난중일기의 기록으로 재구성한 16세기 당시의 날씨는 현재의 장마철과 비슷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요. 이순신은 ‘더위가 쇠도 녹일듯 하다’ ‘추위가 살을 도리는 것 같았다’ 등 생생한 표현들로 당시의 날씨를 전하고 있는데요. 조선왕조실록에도 기상 이변과 재해기록은 있지만, 해안지역의 날씨 변화를 기록한 것은 난중일기가 유일하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