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의 서가]②"美中사이 낀 한국, 400년 전 조선을 반면교사 삼아라"
by이진철 기자
2015.11.04 05:00:00
권태신 한국경제연구원장의 ''역사평설 병자호란''
경제연구원장 모임서 추천받아.. 현재 한국과 비슷
명·청 권력다툼에 치이던 조선, 청나라에 무릎꿇는 굴욕
싱가포르 줄타기 외교 본받고 영토분쟁 없는 미국 활용해야
[이데일리 이진철 기자]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역사학자 카(E. H. Carr)는 규정했다. 역사는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다. 미래를 위한 교훈은 발전을 이끄는 원동력이기도 한 셈이다.
권태신 한국경제연구원장은 1976년 공군 장교로 예편한 후 40년 가까이 경제관료로 공직생활에 몸담는 동안 주요 정책을 입안해 집행했던 경험이 있다.
권 원장은 재정경제부 국제금융국장을 맡고 있던 2003년 북한 핵위협에 따른 국기신용등급 위기 상황이 발생했을 때를 떠올렸다. 당시 반기문 외교보좌관 등과 함께 비밀리에 미국 무디스 본사로 건너간 권 원장이 장시간에 걸친 설득과 대화 끝에 국가신용등급을 그대로 유지시킨 성과는 지금도 공무원 사이에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다.
현재 민간경제연구소를 책임지는 자리를 맡고 있는 권 원장은 자유시장경제의 발전을 위해서는 규제개혁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권 원장이 ‘역사평설 병자호란’이라는 책을 접한 계기는 지난해 민간경제연구원장 모임에서 현대경제연구원의 하태영 전 원장의 추천 덕분이라고 했다. 책을 읽는 순간 권 원장은 현재 우리 상황이 400여년전 명과 청나라 사이의 패권다툼 틈바구니의 조선과 비슷하다는 것을 더욱 실감했다고 한다.
인조가 집권하던 당시 조선은 명·만주(청나라)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고자 했지만 쉽지 않은 상황이었고, 이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자위 능력도 없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기 10년 전인 1627년 후금은 이미 정묘호란을 일으켰다. 당시 이괄의 난으로 정권의 안위가 최우선이었던 조선은 후금을 형으로 하는 형제관계를 맺고 정묘호란을 수습했다.
하지만 정묘호란 후의 잃어버린 10년은 병자호란의 단초를 제공했다. 정묘호란이 끝난 1627년부터 병자호란이 일어나는 1636년까지 10년은 끼어있는 약소국이자 샌드위치 처지였던 조선이 명·후금의 권력다툼에 치이다가 끝내는 선택의 기로로 내몰렸던 시간이었던 셈이다.
권 원장은 “정묘호란 이후 후금과 화약을 맺고 조선은 대외적으로 이중 정체성을 갖게 됐다”면서 “명을 임금으로 섬기며 신하로 자처하던 상황에서 이제 후금을 형으로 받들며 아우가 되기로 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정묘호란 후 병자호란 때까지 10년 간 인조는 아무런 대비책도 마련하지 못했다. 권 원장은 “조선은 내정과 외교 양면에서 극히 전략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했어야 했지만 인조정권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인조가 집권 이후에는 논공행상의 난맥상에서 비롯된 이괄의 난 때문에 반란 진압 뒤에는 오로지 정권 보위에 급급하다가 정묘호란을 만났다”면서 “집권하면서 제시했던 공약과 개혁구상은 그 와중에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고 덧붙였다.
결국 인조가 병자호란으로 삼배구고두례(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것)를 해야 하는 치욕을 겪었던 역사는 지금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는 게 권 원장의 설명이다.
지난 5일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협상이 최종 타결됐다. 중국 역시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을 출범했다. G2의 경제전쟁 신호탄이 터졌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TPP 협상 타결로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40%, 세계 교역량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세계 최대 경제블록이 탄생했다. 권 원장은 “이는 단순한 자유무역협정이 아니다”라며 “중국의 경제적 팽창을 견제하려는 미국과 일본의 경제동맹”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TPP가 세계무대에서 미국의 패권을 유지·확대할 ‘새로운 규칙’이라고 강조하면서 목표가 중국임을 명확히 해왔다. 오바마 대통령은 TPP 협상이 타결된 직후 성명을 통해 “중국이 세계 경제질서를 쓰게 할 수는 없다”며 부상하는 중국을 견제하겠다는 의지를 다시한번 강조했다.
반면 중국은 AIIB의 출범으로 ‘아시아태평양 자유무역지대(FTAAP)’ 구상 등 자신들이 주도하는 새로운 국제 경제 질서를 만들어가고 있다.
권 원장은 “미국과 중국이라는 G2의 패권 다툼 속에 한국은 누구와 손잡을 지, 어는 쪽에 줄을 서야 할지 선택해야 하는 딜레마에 직면해 있다”면서 “절묘한 줄타기 외교가 필요한 이런 상황은 병자호란 직전 조선과 유사하다”고 말했다.
그는 실리 외교를 성공적으로 이뤄낸 사례로 싱가포르를 꼽았다. 타이완 ‘독립’을 주장하는 천수이볜 총통이 재선에 성공한 이후 ‘양안 관계’가 악화일로이던 지난 2004년 싱가포르의 리셴룽과 리콴유 전 총리는 중국측의 신뢰를 잃지 않고 타이완으로부터 군사훈련 장소를 제공받았던 절묘한 줄타기 외교기술을 선보였다. 우리가 이같은 점을 배워야 한다는 것.
권 원장은 “중국과 일본은 주변국들과 영토분쟁을 겪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면서 “우리는 지리적으로 영토분쟁 가능성이 없는 우방인 미국을 잘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OECD 대사를 역임하면서 봤던 미국의 인종갈등, 중동의 종교갈등 등에 비하면 최근 우리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정치·사회·계층·세대 등의 갈등은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고 피력했다. 권 원장은 “사회 현상인 갈등을 풀어나가려면 폭력이 아닌 법치주의를 근본으로 상호신뢰를 통해 평화와 합법적 방법으로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49년 경북 영천 출생으로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 벤더빌트대학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 영국 런던시티대학에서 MBA를 취득했다. 공군 중위로 예편한 후 1976년 행정고시를 통해 공직에 입문했다. 국제금융, 경제협력 분야에서 경력을 쌓았고 재정경제부 제2차관을 거쳐 OECD 대표부 대사, 국무총리실장,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2014년 3월부터 한국경제연구원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