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상륙NFT]①그림파일 한 점 수백억원…NFT, 한때 유행인가 새 시장인가
by오현주 기자
2021.03.22 03:30:01
암호화 기술적용 NFT, 미술시장 변화 예고
국내 첫 NFT경매 마리킴 '미싱 앤드 파운드'
288이더리움 낙찰…시작가 11배 오른 6억
김봉수·요요진도 조각·회화 NFT 출품 예정
소더비·서울옥션…전통경매사 줄줄이 나서
"미술품 투자로만 봐"vs"또하나 장르 탄생"
| 작가 김봉수의 브론즈 조각작품 ‘나는 거짓말쟁이 21-2’(2021·왼쪽)과 작가 요요진의 회화작품 ‘요요 형상 10’(2021). 두 작가의 작품이 다음 국내 ‘NFT 미술품 경매’에 뛰어든다. ‘나는 거짓말쟁이 21-2’는 사진으로 촬영한 그림파일과 3D로 촬영해 360도로 볼 수 있는 VR 영상파일로 이달 말에, ‘요요 형상 10’은 4월 1∼15일 여는 작가의 개인전과 연계해 같은 기간 동안 NFT 작품으로 제작한 15점을 경매에서 거래한다(사진=피카프로젝트·갤러리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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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친절한 예고편’은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난 11일 미국 뉴욕에서 날아온 뉴스 한 토막에 화들짝 놀라는 것으로 NFT(Non-Fungible Token·대체불가능토큰)에 ‘입문’했다. 크리스티 뉴욕 온라인 경매에서 그림파일(jpg) 하나가 6934만달러(약 783억원)에 낙찰됐다는 그 뉴스. 미국 디지털 아티스트 비플(39·본명 마이크 윈켈)이 NFT 암호화 기술을 적용해 제작한 콜라주 작품 ‘매일: 첫 5000일’(2021) 얘기다. 2007년부터 작업한 5000점을 붙여 한 이미지로 만든 이 작품 덕에 이름도 알린 적 없는 무명작가는 하루아침에 ‘세계 경매 최고가 생존작가 랭킹 3위’란 아찔한 타이틀도 꿰차게 됐다. 미국 조각가 제프 쿤스, 영국 출신 데이비드 호크니란 거장들의 뒤를 이어서.
세계 미술계는 발칵 뒤집혔다지만 그저 먼 나라 얘기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한 주 뒤 국내서도 비슷한 소식이 전해진 거다. 국내 최초 ‘NFT 미술품 경매’에 나선 작가 마리킴(44)의 10초짜리 영상작품 ‘미싱 앤드 파운드’(Missing and Found·2021)가 그랬다. 지난 17일 오후 2시 시작가 5000만원에서 출발한 작품가는 24시간 뒤인 18일 오후 2시 경매를 마감할 땐 11배 이상 뛴 6억원(288이더리움)이 돼 있었다. ‘NFT 국내 첫 낙찰 작품’은 ‘마리킴의 역대 최고가 작품’이란 동시기록을 쓰게 됐다.
‘어?’ 하는 사이에 ‘훅!’ 들어왔다. 뭔지 파악도 못했는데 저만큼 달아난 형국이랄까. ‘비플 충격’ 이후 불과 열흘 남짓 만에 ‘NFT 시장’ 한복판에 뚝 떨어진 셈이다. ‘한국 미술시장에 상륙한 NFT’가 그중 하나. 빠르고 강력하게 미술시장 판도 변화를 예고한 셈이다.
국내 첫 ‘NFT 미술품 경매’를 진행한 곳은 피카프로젝트다. 미술품 공동구매와 전시기획, 아티스트 매니지먼트까지 하는 종합아트플랫폼회사. 마리킴 경매 직후 전화로 만난 송자호(26) 공동대표는 “세계시장의 흐름을 봤을 때 블록체인은 모든 사업분야에서 빼놓을 수 없는 기술이란 판단이 있었다”고 말한다. 지난해 여름부터 블록체인 기술을 점검하고 이와 접목할 미술품을 기획했다. 경매의 마케팅 타깃을 일반 미술품 컬렉터와 다른 블록체인 커뮤니티, 특히 NFT에 관심 있는 국내외 커뮤니티로 잡았다는 점이 특이하다. 국내 NFT 플랫폼 중 하나인 디파인아트를 통해 진행한 경매는 “30개 계정에서 경합이 이뤄졌고 매우 치열했던 것을 확인했다”며 “낙찰자는 내국인인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 작가 마리킴의 10초 영상 ‘미싱 앤드 파운드’(2021). 왼쪽이 영상의 시작, 오른쪽이 영상의 끝 장면이다. 지난 17일과 18일 걸쳐 24시간 동안 진행한 국내 첫 ‘NFT 미술품 경매’에서 ‘미싱 & 파운드’는 288이더리움(약 6억원)을 제시한 응찰자에게 낙찰됐다(사진=피카프로젝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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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프로젝트는 마리킴과 더불어 소속작가인 조각가 김봉수(44)의 ‘나는 거짓말쟁이 21-2’(2021)를 이달 말 예정한 다음 NFT 미술품 경매 출품작으로 준비 중이다. 브론즈 조각인 ‘나는 거짓말쟁이 21-2’는 사진으로 촬영한 그림파일과 3D로 촬영해 360도로 볼 수 있는 VR 영상파일, 두 가지로 나온다. 송 대표는 마리킴의 또 다른 작품도 준비 중이라고 귀띔한다. 다만 “대중을 상대로 시장을 확장한다는 목표로 이번엔 1000만원 미만의 소액 에디션이 나설 것”이라고 했다.
빠른 속도로 접근하며 미술시장 판도 변화를 예고한 NFT는 암호화 기술을 적용한 ‘디지털 자산 거래’란 큰 틀 아래 ‘디지털 작품 유통’이란 새로운 방식을 던져놨다. 그동안 세계 미술시장을 좌지우지해온 전통적인 미술품 경매사들이 차례로 ‘초짜 NFT 미술시장’에 신고식을 하는 모양새인데. 255년 역사의 크리스티가 비플의 작품을 거액에 팔아치운 이후, 277년 역사의 소더비도 가세했다. 디지털 아티스트 팍(Pak)과 협업해 내달 ‘NFT 미술품 경매’를 열겠다고 선언한 상태다.
국내에선 가장 오래된 미술품 경매사인 서울옥션이 나선다. 서울옥션이 작가발굴을 맡고, 관계사인 서울옥션블루가 기술개발·관리를 맡아 올해 3분기 디지털 자산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할 계획이다. 유나리 서울옥션블루 홍보마케팅팀장은 “그간 빈티지·스니커즈 등 끊임없이 미술품 대중화를 위해 시도해온 일환”이라면서 “디지털 아트의 대중화를 내다본 셈”이라고 말했다. 이어 “오프라인처럼 디지털 세상 속에서도 작품을 감상하고 즐기려는 또 다른 층이 있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이를 위해 2분기는 기술점검·작가발굴에 힘을 쏟을 것으로 보인다. 오프라인 작가 중 디지털로 갈 수 있는 작가를 고르고, NFT를 위한 신진작가를 발굴하는 등 기존 작가풀을 최대한 이용한다는 거다.
작가 스스로 붐에 올라 탄 경우도 있다. 영국 현대미술의 거장 데미안 허스트(56)는 “창고에 묵혀둔 작품 1만점을 NFT 등 암호로 변환해 세상에 내놓겠다”고 했다. ‘커런시 프로젝트’라고 명명한 이 작업을 두고 허스트는 자신의 SNS를 통해 “제작하는 것부터 작품을 NFT로 변환하고, 구매·보관까지 전 과정이 예술작품”이라고 했다. 발 빠른 허스트의 행보에는 이미 자신의 판화작품 ‘벚꽃’ 연작을 온라인으로 판매하며 비트코인·이더리움을 결제수단에 포함했던 경험이 있다. 이달 초 진행한 온라인 판매에는 4000여명의 구매자가 달려들어 7481점을 사갔다. 한 점당 3000달러(약 339만원)씩이니 2244만달러(약 253억원)어치를 팔아치운 셈이다.
| 영국 현대미술의 거장 데미안 허스트가 자신의 판화작품 ‘벚꽃’ 연작과 함께 섰다. 최근 허스트는 “창고에 묵혀둔 작품 1만점을 NFT 등 암호로 변환해 세상에 내놓겠다”고 선언했다. 발빠른 행보에는 ‘벚꽃’ 연작을 온라인으로 판매하며 비트코인·이더리움을 결제수단에 포함했던 경험이 있다(사진=데미안 허스트 트위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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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작가 요요진(37)도 NFT 시장에 뛰어들 것을 예고했다. ‘국내 최초 NFT 연계 전시’를 내걸었는데, 4월 1일 서울 성수동 공장갤러리에서 여는 개인전에 맞춰 오픈씨 플랫폼을 통해 작품을 업로드할 예정이다. 오프라인 전시에 거는 34점 중 15점을 NFT 작품으로 제작해 경매에서 거래하고 전시가 폐막하는 15일 경매도 마감한다. 캔버스 회화작품 ‘요요 형상’(2021) 연작과 ‘요요 변형’(2021) 연작 등이 나선다. 송 대표는 마리킴의 또 다른 작품도 준비 중이라고 귀띔한다. 다만 “대중을 상대로 시장을 확장한다는 목표로 이번엔 1000만원 미만의 소액 에디션이 나설 것”이라고 했다.
예술품 데이터분석 플랫폼 크립토아트에 따르면 세계서 이달 초까지 NFT 기반으로 거래한 예술작품은 10만여점에 달한다. 2220억원어치다. 이 ‘뜨거운 감자’를 두고 국내 미술시장에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수백년 이어온 고전적인 미술품 제작·유통방식을 흔들고 있다”며 “가뜩이나 작은 미술시장에서 파이를 또 나누는 격”이란 우려가 크다. 하지만 “미술품 경매에서 와인·보석·악기·자동차까지 파는 시대인데 디지털 그림이라고 예외일 필요는 없다”며 “되레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 전체 파이는 커질 것”이란 목소리도 적지 않다.
| 미국 디지털 아티스트 비플이 NFT 암호화 기술을 적용해 제작한 디지털 콜라주 작품 ‘매일: 첫 5000일’(2021·왼쪽)과 그 작품에 붙인 5000점 중 한 작품(오른쪽). 지난 11일 크리스티 뉴욕 온라인 경매에서 6934만달러(약 783억원)에 낙찰되며 세계 미술시장을 발칵 뒤집었다(사진=크리스티 경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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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품 유통업에 종사하는 한 전문가는 “빠르게 진행했다가 빠르게 식을 한때 유행”이라고 일축했다. “미술품을 단지 투자로 보는 시선이 만든 트렌드”라는 것이다. “사람을 감동시키는 미술품은 여전히 눈앞에 형체를 드러내는 명작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도 했다.
반면 “미술품을 디지털 자산화하는 소유방식은 가속할 것”이란 전망도 만만치 않다. 유나리 서울옥션블루 팀장은 “투자 목적으로 미술품을 사고파는 이들이 없지 않으나 미술관에서 작품을 보듯이 나만의 디지털 세계에 작품을 걸고 소유하고 싶은 수요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시대가 바뀌면서 달라지는 시대상”으로 분석한다는 거다. “모든 게 복합적이다. 글로벌 흐름 위에 코로나19가 겹치고, 온라인 경매시장이 커지고, 밀레니얼 세대가 부상하는 등 여러 요인이 맞물린 결과다.”
김태윤 피카프로젝트 전시기획팀 실장은 “온라인 매체와 기술을 활용해 새로운 작품을 팔고 상용화하는 시장이 작가에게는 오히려 오프라인에만 의존하지 않는 다른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맞고 틀리고는 없다.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해 대중화를 앞당긴다면 더 큰 시장을 내다볼 수 있고, 1970년대 앤디 워홀이 그랬듯 국제 흐름에 걸맞은 또 하나의 미술 장르를 탄생시킬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