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년 깎고 깨고…'난 누구?' '여자, 조각가!'

by오현주 기자
2018.07.09 00:12:00

한국여류조각가회 특별기획전 '아이, 워먼'
'조각=남성' 편견 깨며 창립한 지 45주년
1세대 창립회원부터 원로·중견·신예까지
'묵직한 무게감' '기발한 고안' 둘다 잡아
선화랑서 17일까지…150여점 걸고 세워

배형경의 ‘존재, 물음’(2016).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선화랑서 여는 한국여류조각가회 45주년 특별기획전 ‘아이, 워먼’의 초입에 세웠다. ‘나는 누구고 우리는 어디서 왔나’를 읊조리는, 세로 190㎝의 고뇌하는 거대한 인간상이다. 여성작가로는 드물게 30년 넘게 인체만으로 표현주의 구상조각을 고집해온 배 작가의 손끝에서 나왔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14년 차 전업주부로 살았다. 그 세월을 문득 돌아보니 모아둔 영수증과 가계부만 남았더라. 앞으로도 별로 달라지지 않을 인생을 대변하는 듯. 어느 날 그간 죽자고 모아둔 영수증을 다 태워버리자 작정했다. 가계부에서 떼어내 잔뜩 쌓아놓고 불을 댔다. 그런데 까맣게 ‘지워져’ 가더라.”

묘한 일이었다. 홀랑 타버릴 줄 알았던 영수증이 그을어가다니. 지출내역이 적힌 삶의 내용은 지워지고 모양과 형체만 남겼다. 그날 이후 영수증은 작품의 소재가 됐다. 풀로 한 장씩 붙여 8m 길이의 웨딩드레스를 만들고 어린아이가 입을 만한 앙증맞은 원피스도 만들었다. 한 장씩 접어 짰더니 거대한 가운이 생겨나기도 했다.

“버려주세요”가 대세가 된 영수증. 하지만 영수증을 모아본 사람은 안다. 보관기간이 지날 무렵이면 그 안에 찍힌 내용도 사라져 간다. 소용 다한 물질이 남기는 애처로운 흔적.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폐기처분될 그것. “누군가를 만나고 물건을 사고, 사실 영수증이 객관적인 자료인데 정작 기록이 되진 못한다. 차라리 작품을 위한 오브제로 적당하다 싶었다.”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선화랑. 매번 전시 대표작을 내거는 쇼윈도에 2m는 훌쩍 넘길 가운이 걸렸다. 맞다. 그 영수증 작품이다. ‘1400만원 유니폼’(2018), 조각가 정혜경(41)이 일일이 손으로 한 장씩 겹쳐 짜 만든 그것. “최저임금이 7530원이던 때 한 해의 주부 일당을 최저임금으로 쳐서 한번 계산해봤다. 1400만원이었다.” 액수야 그렇다 치자. 유니폼은 또 뭔가. “지나고 보니 여자의 옷이란 게 유니폼에 불과하더라”는 자조 섞인 대답이 나온다. 하긴 정 작가는 전작 웨딩드레스에도 ‘유니폼’이란 타이틀을 수여했더랬다. ‘1억 5000만원 유니폼’이라고. 결혼 이후 십수 년 모은 영수증의 액수를 다 합쳤더니 그만큼 되더라고.

정혜경의 ‘1400만원 유니폼’(2018·앞). 일일이 손으로 한 장씩 영수증을 겹쳐 짜 만들었다. 1400만원어치다. 뒤로 ‘도시환영-완벽한 껍데기’(2018)가 보인다. 역시 영수증을 한 장씩 풀로 붙여 어린아이가 입을 만한 옷을 지어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여자가 조각을 한다고?” 이후 45년

한국여류조각가회가 45주년을 맞아 특별기획전 ‘아이, 워먼’을 열었다. ‘난, 여자’란 뜻이다. 하지만 전시는 행간의 의미를 채운다. “나는 여자다. 그리고 조각가다.” 그런 만큼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자”는 여성조각가의 정체성에 초점을 맞춘다. 김정숙(1917∼1991), 윤영자(1924∼2016) 등 1세대를 조각가를 비롯해 강은엽·고경숙·김정희·김윤신·김효숙·배형경·유영준·이종애·황영숙 등 원로와 중견, 김경민·김리현·김지원·나수정·오누리·이원정·이은영·이은희·이진희·정소영·정혜경·최미애 등 한창 활동하는 30~40대까지, 한국조각계에서 내로라하는 여성조각가 80여명이 의기투합했다. 브론즈·돌·나무·세라믹·테라코타 등으로 작업한 1~2점씩을 걸고 또 세워 전시작만 150여점에 달한다.

김정숙의 ‘비상’(1986). 브론즈를 소재로 새의 날개짓을 역동적으로 형상화한 반추상 작품. 한국여류조각가회 1대 회장을 지낸 김 작가는 유독 새의 날개 이미지를 좋아했다고 전해진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강은엽의 ‘긴 여행에 관한 책’(2004). 함부로 손조차 함부로 댈 수 없을 듯한 고목의 결을 좇아 사람 사는 일의 희로애락을 가로 60㎝ 남짓한 나무덩이에 감춰놨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한국여류조각가회가 탄생한 것은 1974년. ‘조각=남성’이던 시절이었다. 여성이 조각을 한다? 그건 신기한 구경거리였고 더 정확히는 무시당할 일이었다. 조각이 뭔가. 강하고 견고한 양감의 구성체다. 형상이 있든 없든, 구상이든 추상이든 기본 전제는 3차원의 ‘덩어리’. “너희 여자가 그 덩어리를 ‘감히’ 어찌 다루겠느냐.” 보고 듣지 않아도 충분히 작용했을 법한 편견이다.



그 반항심리에서 나섰을 수도 있다. 외부의 차별이 컸지만 내부의 성찰도 만만치 않았다. 스스로 위축하고 주저앉는 한계를 돌아본 거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여류조각가회가 창립하던 당시 화단서 활동하는 여성조각가는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 하지만 ‘역경’은 뚫으라고 있는 게 아니던가. 창립하던 그해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연 ‘창립전’에는 33명의 여성조각가가 모였다. 이번 전시를 연 선화랑과의 인연도 무시 못한다. 1982년 국내 상업화랑 최초로 한국여류조각가회 35인의 초대전을 열면서 선화랑은 이들과 처음 손을 잡았다. 창업주 김창실(1935∼2011) 전 대표의 배려였다.

최미애의 ‘창 안에 가족-연인’(2018). 나무를 크기대로 겹겹이 자르고 붙여 다정한 연인의 형상을 ‘빚어냈다’. 벽으로 투영한 조명 빛은 덤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그러곤 45년. 사람 나이로 치면 중년에 접어든 지금 회원 수는 300여명에 달한다. 새로운 출사표가 필요했다. “점잖은 모습보단 역동적인 활동으로.” 14대 회장을 맡은 조각가 심영철(60·수원대 교수)의 일성이다. 사실 여성만이 아니어도 조각계의 고민이 짙은 요즘. ‘3중고’란 말이 나온 지도 꽤 됐다. ‘제작·운반’이 힘든 거야 다 아는 사실이지만 ‘팔리지도 않는다’는 탄식까지 붙여야 하는 상황인 거다.

△‘묵직한 무게감’ ‘기발한 아이디어’ 둘 다 빛나

전시는 한국여성조각계를 가늠할 뿐만 아니라 한국조각계 전체의 밑그림을 그린다. 묵직한 무게감과 재기발랄한 아이디어로 무장한 현장 그대로를 옮겨놨다. 전시장의 문을 연 배형경(63)의 ‘존재, 물음’(2016·플라스틱)은 인간 존재에 대한 고뇌를 조형적 화두로 세운 작품. ‘나는 누구고 우리는 어디서 왔나’를 읊조리는, 190㎝ 장신의 인간상이 공간을 압도한다. 배 작가는 여성작가로는 드물게 30년 넘게 인체만으로 표현주의 구상조각을 고집해온 이다.

배형경의 ‘존재, 물음’(2016) 뒷 모습. ‘나는 누구고 우리는 어디서 왔나’를 읊조리는, 세로 190㎝의 고뇌하는 거대한 인간상은 여성작가로는 드물게 30년 넘게 인체만으로 표현주의 구상조각을 고집해온 배 작가의 손끝에서 나왔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손조차 함부로 댈 수 없는 고목의 결을 좇아 사연 있는 세월을 형상화한 작품도 있다. 강은엽(80)의 ‘긴 여행에 관한 책’(2004·나무). 사람 사는 일의 희로애락을 가로 60㎝ 남짓한 나무덩이에 감춰놨다. 타계한 김정숙·윤영자의 작품은 회원들의 오마주다. 김정숙의 ‘비상’(1986·브론즈)을 앞세워 ‘비상C’(1976·브론즈)와 ‘여인흉상’(1960·브론즈), 윤영자의 ‘애’(1991·대리석) 등이 나섰다. 두 작가는 한국여류조각가회 1·2대 회장을 지냈다.

이은희의 ‘아침햇살’(2014·아래)은 대리석으로 작업한 여인의 흉상. 바람결에 휘날리는 머릿결의 여인에게선 육중한 돌무게따윈 느낄 수 없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뿐인가. ‘볼 때마다 기분 좋은 작품’이란 극찬을 받으며 ‘없어서 못 판다는 작가’ 김경민이 여성골퍼의 싱그러운 포즈를 잡아낸 ‘봄날’(2018·브론즈), 이만큼이나 상큼한 여성의 흉상을 반구상으로 작업한 이은희의 ‘아침햇살’(2014·대리석), 다소 어눌해 보이는 그래서 편안한 여인상을 빚은 정소영의 ‘행복한 나날’(2016·테라코타), 하이힐과 여성의 발을 교묘히 결합한 발상이 눈에 띄는 김지원의 ‘모던 걸’(2013·브론즈) 등등. 시선 뺏길 작품은 끝이 없다.

여성예술가에게 붙이던 ‘여류’란 말을 더는 쓰지 않는 요즘이다. 차라리 ‘걸 크러시’가 친숙한 세상이 아닌가. 그럼에도 이들이 ‘여류’에서 동질감을 찾는 이유가 있다. “우리가 바로 그 거친 시대를 지나오지 않았는가”란 상징과 역사다. 굳이 더 이상 구분이 필요치 않아 언젠가는 사라질 ‘여류’고 ‘여류조각가회’라면 좋으련만. 이들이 뭉칠 일은 한동안 계속될 듯하다. 전시는 17일까지.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선화랑서 여는 한국여류조각가회 45주년 특별기획전 ‘아이, 워먼’에 나선 ‘여성’들. 김경민의 ‘봄날’(2018·브론즈)부터 시계 반대방향으로 박성희의 ‘회상록-봄봄’(나무), 정소영의 ‘행복한 나날’(2016·테라코타), 문희의 ‘바람 Ⅲ’(2014·브론즈), 이은영의 ‘바람을 느껴봐’(2018·브론즈)(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