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와돈]②1만5000원짜리 책한권으로 1년치 후원금 걷어

by박수익 기자
2014.02.14 07:01:00

사진= 이데일리 한대욱 기자
[이데일리 박수익 이도형 기자] 국회의원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대기업 대외협력담당 K부장. 행사장 입구에 가득 쌓인 책 한권을 집어 들고, 방명록에 서명한다. 그리고 양복 안쪽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모금함에 넣는다. 그가 집어든 책 한권의 가격은 1만 5000원. 하지만 K부장은 책 가격을 사전에 문의하지 않았다. 관례대로 준비한 봉투에 ‘예상 책값’을 넣어뒀기 때문이다. 그가 이날 봉투에 담은 금액은 10만원. 책값을 초과한 8만5000원은 정치헌금이다.

국회의원이 자신이 살아온 인생철학과 경험을 묶어 책으로 발간하고 이를 지지자들과 국민들에게 알리는 것은 정상적인 의정활동의 일환이다. 문제는 책값이다.

의원들이 발간하는 자서전 성격의 책은 보통 1만3000원에서 1만5000원으로 정가가 기재돼 있다. 서점에 즐비한 베스트셀러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으로 보일 수 있지만, 실거래가(?)는 웬만한 전집 한 세트 가격을 훌쩍 넘어선다. 카드단말기가 없어 신용카드로는 결제할 수도 없고, 수표를 내는 사람도 없다. 오로지 ‘현금박치기’다.

단편적인 1회성 거래금액은 몰라도 정치인들이 출판기념회를 통해 전체 얼마를 벌어들였는지는 오리무중이다. 공직선거법은 출판기념회의 개최시기(선거일 90일전부터 금지)만 규제할 뿐, 횟수나 금액에 대해선 특별히 제한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출판기념회를 통해 벌어들인 금액에 대한 내역공개 의무가 없다는 얘기다.

현재 국회의원들이 공식후원 모금한도는 연간 1억5000만원(선거가 있는 해는 3억원)으로 모금액과 사용처를 관할 선관위에 신고해야한다. 또 수입·지출 내역에 대한 열람도 가능하다. 그러나 출판기념회는 예외다. 이 때문에 출판기념회는 사실상 편법적 후원모금 창구, ‘보이지 않는 후원회’로 활용된다는 비판이 끊이질 않는다.

1만 5000원 정도의 책을 10만원에 산다면 8만5000원은 음성적인 헌금이다. 임원이 많은 일부 대기업은 책값으로 50만원, 100만원 이상을 내는 경우도 있다는 게 정가의 정설이다. 계열사까지 감안하면 한 그룹에서만 수백만원의 헌금이 오고갈 수도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지역구 의원이 출판기념회를 여는 날이면, 지역주민들을 대거 태운 단체버스가 행사장 주변에 들어찬 풍경도 흔히 볼 수 있다.



일부 의원은 자신의 저서 원고를 직접 쓰기도 하지만, 통상 2000만 내외로 알려진 대필료를 내고 책을 출판하기도 한다. 그래도 상임위원장이나 중진급들은 1억원 이상의 수입은 남긴다는 후문이다. 출판기념회 한 번으로 공식적으로 모금할 수 있는 연간 후원금 한도액을 너끈히 걷어 들이는 구조다.

지난해 출판기념회를 연 여권의 유력인사는 3억원 이상의 수입을 올렸다고 알려졌다. 물론 해당 의원 측은 부인한다. 지방선거 출마를 앞둔 유력인사도 출판기념회로 선거자금을 든든히 준비했다는 소문이 회자된다. 모 상임위원장은 긴급한 국회 본회의 안건이 상정된 날에 출판기념회를 열어 상대적으로 ‘손해’봤다는 얘기도 있다.

일부 의원들 사이에서는 자정 움직임을 보이기도 한다. 보건복지위 소속 신의진 새누리당 의원은 지난해 출판기념회를 열면서 ‘피감기관에게는 책을 판매하지 않는다’고 공지했고, 실제 피감기관들도 이러한 분위기를 감안해 행사장을 방문하지 않았다고 한다. 신경민 민주당 의원과 이상일 새누리당 의원도 피감기관 등에서 보내오는 화환을 정중히 거절했다.

편법논란에 휩싸인 출판기념회에 대한 비판을 의식한 듯 올해 초 여야는 앞 다퉈 제도 개선도 약속했다.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는 “출판기념회를 하면서 정치자금법을 회피하는 일이 없도록 제도적으로 정비하겠다”고 밝혔고, 김한길 민주당 대표도 “출판기념회의 비용과 수익을 정치자금에 준하게 관리해 회계투명성을 강화하겠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러한 공언이 현실화 될지는 미지수다. 여야대표들의 제도개선 발표 이후에도 출판기념회는 계속 열리고 있으며, 수입내역은 여전히 비공개에 부쳐지고 있다. 지방선거 90일을 남겨둔 오는 3월초가 되면 규정상 출판기념회는 대폭 줄어들 수밖에 없고, 선거가 끝난 후에는 또다시 ‘언제 그랬냐’는 듯 제도개선에 대한 단호한 의지는 물거품처럼 사라질지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