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태호의 그림&스토리]<21>'최초'란 왕관 씌운 '근대'의 무게
by오현주 기자
2021.07.02 03:30:00
▲고희동 ''부채를 든 자화상'' & 나혜석 ''자화상''
전통복식·양장책 혼재로 격변혼란 표현한 고희동
식민지투쟁·여성운동 고뇌 깃들인 신여성 나혜석
시대 개척하고 세상에 도전한 격동의 ''근대'' 투영
| 고희동이 1915년 그린 ‘부채를 든 자화상’.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가 그린 한국 최초의 서양화란 무거운 타이틀을 가졌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해 여름 작가 자신을 그렸다. 사실적으로 인물을 묘사하면서도 피부색과 옷색을 빛에 따라 다양하게 처리하고, 약간 뭉갠 듯한 붓질로 사물을 그리는 등 인상주의 화풍이 뚜렷하다. 인물의 왼쪽 어깨 부분의 바탕천이 찢어져 훼손된 상태로 발견됐고 1980년과 1991년 두 차례의 복원작업을 거쳤다. 캔버스에 유채, 60.8×45.5㎝,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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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태호 미술평론가] 한국에서 근대는 언제부터일까. 근대의 출발 기준을 두고는 최초 개항을 시작한 ‘강화도조약’(1876)부터 ‘갑신정변’(1884), ‘갑오경장’(1894)까지 여러 견해가 있지만 대체로 19세기 후반이라는 데 큰 이견은 없을 것입니다. 새로운 서양문화의 유입은 미술에도 큰 영향을 미쳐 근대미술이 태동했고 이때는 한국 화가들에게 혼란과 도전이 복잡하게 얽힌 대전환의 시기였습니다. 특히 서양화가가 등장하고 서양화에 영향을 받은 일본 화가들이 대거 조선에서 활동하면서 서양화에 대한 관심 또한 크게 늘어났습니다. 그러나 당시 한국에서는 서양화를 배울 만한 곳도, 가르칠 선생도 부족했습니다. 결국 서양화를 배우려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춘곡 고희동(1886∼1965)이 그들 중 가장 먼저였습니다. 바로 ‘일본 유학파 출신 한국 제1호 서양화가’입니다. 그는 많은 서양화를 그렸지만 여러 이유로 현재 단 3점만 남아있는데, 공교롭게도 3점 모두 자화상입니다. 그중 ‘부채를 든 자화상’(1915)은 고희동의 모습을 가장 진솔하게 보여주는 작품이자 한국화가가 그린 최초의 서양화란 타이틀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시적삼을 풀어헤치고 한쪽 다리를 세운 채 앉아있는 인물은 고희동 자신입니다. 가슴을 다 드러내고 오른손으로 부채를 부치며 더위를 식히는 모습입니다. 망중한을 즐기는 편안한 모습이지만 얼굴의 수염이 다소 근엄해 보이게 합니다. 표정은 살짝 경직돼 있습니다. 오른쪽 이마와 광대뼈에 유달리 강한 빛이 비치고 그 세기에 따라 얼굴·가슴의 음영 부분에는 엷은 푸른빛, 적삼 안쪽에는 보랏빛이 감돕니다. 뒤쪽 오른편에는 서양화 액자가 걸렸고 왼편에는 서양식 장정을 한 고급 책들이 놓여, 고희동의 신분과 최초의 서양화가로서의 자부심이 읽힙니다. 장서 위에 올린 사인(‘1915, Ko, Hei Tong’)은 고희동이 도쿄미술학교(도쿄예술대학 전신)를 졸업한 1915년에 제작한 그림임을 알려줍니다.
전반적으로 색은 순도를 높이기 위해 밝은 원색을 사용했고 분할적 터치를 했습니다. 이런 기법으로 비춰볼 때 당시 서구 인상파의 영향을 짐작해볼 수 있는데, 이는 고희동의 도쿄미술학교 지도교수였던 구로다 세이키(1866∼1924), 오카다 사부로스케(1869∼1939), 후지시마 다케지(1867∼1943) 등이 인상파 기법을 추종했던 화가들이었기 때문일 겁니다. 파격적인 자세, 반투명한 모시 질감 등 퍽 인상적인 작품인 반면 다소 어색한 가슴 처리 등이 아쉬운 점으로 꼽힙니다.
고희동은 귀국 후에 서양유화를 가르치는 최초의 미술선생으로 활동했지만 나중에 서양화를 포기하고 동양화로 전향합니다. 이런 변화에는 고희동이 유학을 가기 전 당시 전통회화의 계승자인 안중식(1861∼1919)·조석진(1853∼1920) 등에게서 그림을 배운 영향이 컸을 것입니다. 생전에 고희동은 “나의 유화는 단 한 점도 남아 있지 않다”고 했지만 사후 유품을 정리하던 중 이 작품을 포함해 유화로 그린 자화상 두 점이 발견됐고 전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구입했습니다. 특히 이 자화상은 한국 제1호 서양화가의 최초 유화작품으로 미술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등록문화재 제487호로 지정되기도 했습니다. 고희동은 작품 활동뿐 아니라 서화협회를 이끌며 우리 전통화단을 계승·발전시킨 공로가 있습니다. 보성고 교사 시절에는 제자 간송 전형필(1906∼1962)에게 영향을 끼쳐 그를 문화재수집가의 길로 이끌었고, 간송컬렉션을 갖추는 데 큰 역할을 한 위창 오세창(1864∼1953)을 연결해준 것도 고희동이었습니다.
한국 제1호 남성 서양화가가 고희동이라면 여성화가로는 나혜석(1896∼1949)이 있습니다. 나혜석은 진명여고를 졸업하고 1913년 일본 유학을 떠나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에서 서양화를 배웠습니다. 귀국한 뒤에는 정신여학교 교사로 있던 중에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는데 이때 변호를 맡았던 김우영(1886∼1958)의 적극적인 구애로 그와 결혼을 합니다.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 고희동·김관호(1880∼1959) 등과 함께 활동했고, 국내 최초의 페미니즘 소설 ‘경희’를 비롯해서 시·소설·에세이 등 많은 글을 발표한 문인이기도 했습니다. 전쟁통에 대부분 유실돼 나혜석의 유화작품도 얼마 남아있지 않습니다만, 고희동의 자화상만큼이나 역사적·미술사적 의미가 큰 ‘자화상’(1928)이 다행히 한 점 들어있습니다.
| 나혜석이 1928년 그린 ‘자화상’. 1920년대 세계일주를 떠난 1년 8개월여 중 프랑스 파리에 체류할 당시 영향을 받은 야수파 풍으로 그려졌다. 단순한 재현을 넘어선 강렬한 붓놀림과 자유로운 색채구사가 특징. 굵고 과장된 윤곽선으로 묘사한 인물이 이목구비가 뚜렷한 서구적 외모를 가져 나혜석의 ‘자화상’인지를 두고 논란이 일기도 했다. 그럼에도 체념한 듯한 표정, 굳은 시선 등 작가의 심리와 정서를 잘 표현한 수작으로 손꼽힌다. 캔버스 유채, 63.5×50㎝, 수원시립미술관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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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고 큰 눈, 유난히 긴 코, 주황색 음영이 드리워 도드라진 뺨 등 서구적 미인형의 얼굴이 보입니다. 파마를 한 듯 구불거리는 머릿결이 당시 신여성의 상징을 보여줍니다. 진주단추가 박힌 갈색 의상 등도 세련된 맵시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입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갈수록 배경이 짙어져 마치 심연 속으로 가라앉는 것만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꾹 다문 입과 긴장한 듯한 얼굴, 축 처진 어깨 등이 단순한 슬픔과는 결이 다른 우울함을 전합니다. 한국 최초의 서양여성화가, 신여성으로서의 자부심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나혜석은 1927년 여름 이후 남편과 함께 파리에 머물렀는데, 남편이 법률공부를 위해 독일 베를린으로 잠시 떠났을 때 3·1독립선언서 작성을 주도한 최린(1878∼1958)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이들의 연애는 파리에 소문이 자자했고 결국 남편도 알게 됐지만 나혜석은 남편이 아닌 사랑을 선택했고 귀국 후 이혼을 합니다. 이 연애사건은 당시 근대 한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스캔들로, 나혜석은 쏟아지는 비난을 홀로 감당해야 했습니다. 가족·친지에게 외면당하고 ‘나쁜 어미’란 손가락질에 나혜석은 아이들도 만나지 못하는 등 큰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며 상처를 예술과 문학으로 승화시키던 중 사랑했던 최린이 변절해 총독부의 고위직에 오르자 절망합니다. 그 유명한 ‘이혼고백장’을 언론에 발표한 것도 그즈음입니다. 여성에게만 강요하는 정조관념을 비판하고 남녀의 평등한 사랑을 주장하며 최린에게 ‘정조유린 위자료 청구소송’을 제기해 또 한 번 한국사회를 들썩이게 합니다. 나혜석은 소송에선 이겼으나 사회의 따가운 시선에 옥죄였습니다. 미술학원을 차렸지만 불륜과 이혼으로 세상을 시끄럽게 한 여자가 운영하는 학원에 아이들을 보낼 부모는 없었습니다. 괴로운 속세를 떠나 중이 되고자 수덕사를 찾았으나 만공선사는 “넌 중이 될 여자가 못된다”면서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수덕여관에 여장을 풀고 약 3년간 1인시위를 했을 만큼 간절했지만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입니다.
이후 파리로 돌아가려던 계획도 물거품이 되면서 점차 나혜석은 시들어 갔고 수전증으로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도 없는 상태에서 갑자기 행방불명이 됐습니다. 나혜석의 죽음이 알려진 것은 1949년 3월. 서울 원효로 시립자제원에서 ‘무연고자’로 숨을 거둔 지 4개월 뒤였습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여성화가이자 뛰어난 문인의 죽음치고는 너무나 허무하고 처량했습니다. 이런 비극적 종말을 잉태한 파리시절의 ‘자화상’은 이를 암시하는 듯한 깊은 우울함이 진하게 배여 더욱 안타까운 작품입니다. 어쩌면 전통적 한국여성의 굴레를 벗어나고자 결심했을 때부터 이런 결말을 예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모시적삼에 삼베바지 등 한국적 옷차림이지만 양장한 책과 서양화 액자를 동시에 들여 문화적 격변에 따른 혼란스러운 자신을 표현한 고희동. 식민지 억압과의 투쟁에 더해 여성에 대한 사회적 차별·멸시와도 싸워야 했던 선각자 나혜석. 두 점의 자화상은 ‘최초’라는 이름의 왕관을 씌운 ‘근대’라는 무게가 결코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걷는다는 것은 두려움과 편견에 맞서는 일입니다. 시대를 개척하고 세상에 도전했던 그들의 고뇌를 동력으로 우리는 폭풍우가 몰아치는 근대로 달려나간 것입니다.
1885년 설립한 도쿄미술학교는 오랫동안 일본 미술계를 대표해온 명문학교다. 1949년 도쿄음악학교(1887년 설립)와 합병해 도쿄예술대학으로 덩치를 키운 뒤론 예술계의 대명사가 됐다. 한국에 알려진 건 근대기에 서양화를 공부하려는 학생이 하나둘씩 건너가면서다. 1909년 입학한 고희동이 한국 ‘제1호 학생’으로, 1910년 입학한 김관호가 ‘제2호 학생’으로, 이후 김찬영(1899∼1960) 등이 차례로 이 학교에서 공부했다. 특히 김관호는 고희동을 뛰어넘는 활약을 펼쳤는데, 서양화과를 최우등으로 졸업한 동시에 졸업작품으로 그린 ‘해질녘’(1916)이 도쿄 우에노미술관에서 열린 ‘일본문부성미술전람회’에서 한국인 최초로 ‘특선’을 수상했던 거다. 여인 둘이 해지는 물가에서 목욕하는 뒷모습을 그린 ‘해질녘’(도쿄예술대학 소장)은 ‘한국 최초의 누드화’란 기록도 가지고 있다. 이들의 뒤를 이어서도 도쿄미술학교에서 수학한 이후 한국미술계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작가들이 적잖았다. 근대기 대표작가로는 김복진(1901∼1940), 도상봉(1902∼1977), 김용준(1904∼1967), 오지호(1905∼1982), 김인승(1910∼2001)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