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금 좀 깎아 주세요" 툭하면 정식재판 청구에 법원 골머리

by전재욱 기자
2016.04.18 06:30:00

약식명령보다 중형 부과 못하는 '불이익변경제' 악용 늘어
패소해도 본전, 벌금액 낮추려 영업정지 늦추려 청구 남발
약식명령 불복 재판 청구 1997년 1.8%→ 작년 11.5%로 급증
판사 "벌금액 두고 피고와 흥정하는 시장상인 된 기분" 토로
불이익변경제 폐지시 '재판받을 권리&ap...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불이익변경제도’를 악용한 사례가 크게 늘고있어 법원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 불이익변경제도는 약식명령을 받은 피고인이 정식재판을 청구한 사건에 대해 약식명령보다 무거운 형을 내리지 못하도록 규정한 제도다.

통상 검사는 가벼운 죄를 저지른 피고인에 대해서는 정식기소를 하지 않고 약식기소를 한다. 재판이 열리지 않는 대신 피고인에게는 벌금형이 내려진다. 하지만 벌금형도 억울한 피고는 정식재판을 청구할 수 있다. 불이익변경제도가 적용되는 게 바로 이 시점이다. 법원은 약식명령 때 내려진 벌금형 이상의 형을 부과하지 못한다. 피고인으로서는 밑져봐야 본전인 셈이다.

불이익변경제도는 국민의 재판받을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좋은 취지로 도입된 제도다. 하지만 최근 이 제도를 악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밑져봐야 본전이니 일단 조금이라도 벌금을 낮추자는 목적으로 정식재판을 청구하는 사람이 크게 늘고 있다. 또 재판 중 형집행이 중지되니 최대한 벌금을 내는 시기를 늦추려는 의도로 정식 재판을 청구하는 사람도 증가하고 있다.

사법정책연구원에 따르면 불이익변경금지 원칙이 도입된 1997년 이후 ‘약식명령→정식재판’ 비율이 1997년 1.8%에서 2014년 11.5%로 10% 포인트 가량 늘었다.

오로지 벌금을 낮출 셈으로 정식재판에 오는 사건이 많았다. 정식재판을 청구한 피고인 대부분은 판사에게 무죄를 호소하기보다는 벌금을 깎아달라고 요청하기가 다반사였다.

한 부장판사는 “벌금액을 두고 피고인과 흥정을 하는 시장 상인이 된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정식재판을 청구하고 법정에 출석하지 않는 피고인도 많았다. 피고인이 재판에 나오지 않아 법원이 피고인을 나오라고 신문에 게재하는 ‘공시송달’ 사건도 2010년 이후 매년 15%를 넘어서고 있다.



검사 출신 변호사는 “재판을 청구하고 재판에 안 나오는 것은 재판을 끌어 벌금형 선고를 늦추려는 의도”라고 말했다.

불이익변경제도를 이용해 구청에서 받은 영업정지 등 행정처분을 미루려는 꼼수도 등장한다. 미성년자에게 술을 팔다가 적발될 경우 구청에서 영업정지 처분을 받고, 검찰에서 약식명령을 통해 벌금을 부과받는데 정식재판청구로 이 두가지 처분을 모두 미룰 수 있다.

법조계 관계자는 “장사를 당분가 더하기 위해 유죄 확정 전까지는 영업정지 등 행정처분이 지연되는 점을 노린 정식재판 청구사건이 꽤 된다”고 말했다.

문제는 2018년 이후 이런 악용 사례가 더 늘어날 수 있다는 점이다. 2018년부터는 500만원 이하 벌금형예 집행유예제도가 시행되기 때문이다. 약식기소로 5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받은 피고인들은 집행유예 판결을 노리고 대거 정식재판을 청구할 가능성이 커진다는 얘기다.

법조계 관계자는 “2014년 기준 전체 약식명령 사건 중 벌금 500만원 이하 사건이 97%인 점을 고려하면 정식재판 청구 홍수가 예상된다”며 “무거운 사건에 더 집중해야 할 사법 자원을 가벼운 사건에 투입하는 것은 효율성과 경제적인 측면에서 문제”라고 지적했다.

제도의 오남용을 줄이고자 실무적으로는 △벌금 분납 및 납부 연기 선고 △영업범 사건 정식기소 △형사소송비용 부담 △외국에서 시행하는 유죄협상(plea bargain) 도입 방안 등이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법조계에서는 불이익변경금지 원칙을 없애는 게 근본해결책이라 입을 모으고 있다. 독일, 프랑스, 일본 등은 우리의 ‘약식명령→정식재판’과 유사한 절차에서 불이익변경금지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제도 폐지를 반대하는 목소리도 높다. 제도 폐지가 자칫 국민의 재판 받을 권리를 침해하는 것으로 연결될 수 있어서다.

17대와 18대 국회에서도 이 제도 폐지를 위해 법률 개정안이 발의됐는데 결국 이러한 점 때문에 부결됐다. 19대 국회에도 같은 개정안이 계류돼 있으나 사실상 통과는 물 건너간 상태다.

손종학 충남대 로스쿨 원장은 “불이익변경금지 원칙을 없애는 것은 사건 처리 부담을 줄이려는 사법 행정적 발상”이라며 “정식재판을 청구하려는 피고인의 심리가 위축할 우려가 있으므로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